나이가 들면 무릎이 시리다지만 나이에 관계없이 “슬하가 쓸쓸하면 오뉴월에도 무릎이 시리다”는 속담이 있다. “자식도 슬하의 자식”이라는 말도 있다. “슬하에 자녀가 얼마나 됩니까?”라는 질문도 한다. 이제는 잘 쓰지 않는 말이 된 슬하(膝下)는 무릎 아래라는 뜻이다.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움직이다가 부딪히고 다치는 아이를 가장 안전하게 기르는 것은 부모가 다리를 오므려 무릎 안, 곧 슬하에서 놀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데리고 기를 때가 자식이지 결혼해 떠나고 나면 남과 같다. 장가간 아들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사돈의 8촌’이라 하지 않던가.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논 기억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부모의 무릎을 벗어난 아이는 일어서다가 앞으로 넘어지곤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에는 줄리엣의 유모가 “아가, 앞으로 넘어졌니? 철이 들면 뒤로 넘어지겠지”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앞으로 넘어지다가 뒤로 넘어지는 중간에 무릎을 꿇을 줄 알게 되는 게 바로 철드는 게 아닐까.
사막에 사는 낙타는 모래바람을 뚫고 걷기 위해 눈썹이 길고, 물 없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분을 생산하는 지방질이 가득한 혹을 등에 지고 다닌다. 또 하나 두드러진 특징은 무릎에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는 것이다. 사막에 거센 모래폭풍이 휘몰아칠 때 낙타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시련’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무릎을 꿇고 앉은 단봉 낙타’라는 19세기 프랑스 유화를 보면 낙타가 경건한 동물을 넘어 현자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야고보처럼 기도에 열심인 사람을 ‘낙타무릎’이라고 부른다. 기독교인들은 “머리와 입과 손이 아니라 무릎으로 싸우는 사람들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 세상의 악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무릎으로 싸워 기도하라는 것이다. ‘낙타무릎’이라는 찬송곡은 “내 무릎이 다 닳도록 기도할 테니 하늘 문을 열어 응답하소서”라고 노래한다.
그러니 즐겁게 무릎을 꿇어라. 아니 무릎 꿇을 줄을 알아라. 꼭 하느님, 부처님과 같은 초월자나 절대자가 아니라도 존숭하고 경배해야 마땅한 대상 앞에서 무릎을 꿇을 줄 알아야 제대로 된 사람이며 발전할 수 있는 인간이다.
시인 김충규(1965~2012)는 <대나무 앞에 무릎을 꿇어라>는 시를 남겼다. ‘대나무 속이 왜 비어 있겠는가/ 나날이 비우고 비우기 위하여/ 사는 대나무들,/ 비운 만큼 하늘과 가까워진다/ 하늘을 보라, 가득 채워져 있었다면/ 어찌 저토록 당당하게 푸르를 수 있겠는가/ 다 비운 자들만이 죽어 하늘로 간다/ 뭐든 채우려고 버둥거리는 자들은/ 당장 대숲으로 가라/당장, 대나무 앞에 무릎을 꿇어라’(끝부분 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