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년 전 오늘.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의 회담을 위해 만주 하얼빈 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안중근 의사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안 의사가 발사한 7.62mm 구경 FN 브라우닝 M-1900 권총탄 7발 중 3발은 이토에게 적중했고 나머지는 옆에 있던 수행비서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등도 맞았다.
“까레야 우라!” 러시아어로 ‘코리아 만세’를 외친 안 의사는 저격 직후 러시아 헌병들에게 체포됐다.
총에 맞아 쓰러진 이토는 수행하던 의사가 응급처치를 했지만 30분 만에 숨졌다.
일제 검찰에 신병이 인도된 안 의사는 이듬해인 1910년 2월 14일, 여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이 선고되자 안 의사는 의연히 미소를 지으며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라고 물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는 일제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에게 “군인의 자격으로 이토를 처단했다”며 국제법에 따라 재판을 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일제는 이를 거부했다.
안 의사는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에게‘동양평화론’이 완성될 때까지 사형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해 허락을 받았지만, 일본은 불과 10여 일 후인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교수형을 집행, 32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2006년부터 안 의사가 순국한 중국 뤼순 감옥 인근 지역에서 유해 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지만 아직도 매장 지점과 관련한 결정적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