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기구가 아닌데도 최근 거세게 휘몰아치는 '정치 소용돌이'의 중심에 선 정부 조직들이 있다. '4대 합의제 기구'로 불리는 대법원·헌법재판소·감사원·방송통신위원회 등이다.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보장받아야 할 이들 기구는 새 정부가 출범할 때면 구성원들이 새롭게 임명되거나 교체가 이뤄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 이해관계를 투사하는 '권력의 장(場)'으로 변질돼왔다.
4대 합의제 기구는 수장이 의사결정권을 갖는 독식 구조가 아닌 합의제, 즉 과반수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는 기관이다. 이들 기관은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실상의 권력 기구이지만 구성원들의 임명권이 대통령과 국회에 있다는 점에서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 '코드 인사' 등 논란의 중심이 돼왔다.
'사법부의 우두머리'로 통하는 대법원은 한동안 굳건히 구축해왔던 '진보 벨트'가 무너지고 보수가 우위를 차지하는 모양새다. 앞서 김명수 대법원장은 9일 새 대법관에 중도 성향인 권영준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서경환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윤석열 대통령에게 임명 제청했다. 신임 대법관 후보자들은 중도로 분류되는 조재연 대법관, 진보 성향으로 꼽히는 박정화 대법관의 후임이다. 두 후보자가 임명되면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중도·보수'와 '진보' 구도는 7대6으로 중도·보수 우위가 된다. 9월 퇴임을 앞둔 진보 성향의 김명수 대법원장의 후임이 임명되면 이같은 흐름이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사법부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헌법재판소 또한 지각 변동이 감지되고 있다. 헌재는 위헌 결정을 위해선 재판관 9인 중 6인의 동의가 필요해 재판관의 성향이 판결에 큰 영향을 미친다. 지난 3~4월에는 중도 성향인 김형두·정정미 재판관이 취임하면서 진보 위주였던 헌재의 구도에 변화가 생겼다. 현재 재판관 9명 중 우리법연구회 또는 국제인권법연구회·민변 출신인 유남석 소장과 김기영·문형배·이미선 재판관 등 4명이 진보 성향으로 분류된다. 이에 따라 헌재의 '중도·보수'와 '진보' 구도는 5대4로 중도·보수가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 올해 11월 유남석 소장이 퇴임하게 되면 헌재의 '중도·보수' 색채가 더욱 짙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공무원들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감사원은 '친정부' 인사인 유병호 사무총장을 중심으로 문재인 정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국민권익위원회와 방통위 등을 향해 시퍼런 칼끝을 겨누고 있다. 헌법상 독립적 기관이면서도 대통령 직속 기구인 감사원은 감사원장과 원장의 제청을 받은 6인의 감사위원에 대한 임명권이 대통령에게 있다. 감사원장과 감사위원으로 구성된 감사위원회는 감사 보고서를 의결할 때 재적 7인 중 과반수인 4인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정치적 이해관계가 작용해왔다.
감사위원회의 정치적 구도는 친여(親與), 친야(親野) 성향의 위원들과 감사원 내부 출신 위원들로 분류된다. 윤 대통령의 서울대 법대 79학번 동기인 이미현 위원과 감사원 내부 인사인 유희상 위원은 여권 성향으로 여겨지며, 김인회·이남구·임찬우 위원 등 3인은 야권 성향으로 분류된다. 감사원도 당장 올해 11월까지가 임기인 감사원 내부 출신의 유희상 위원과 내년 2월까지가 임기인 야권 성향의 임찬우 위원 등의 교체가 전망되고 있어 조만간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방통대군'으로도 불리며 방송통신 분야의 실세로 꼽히는 방통위는 최근 대대적인 수술이 예고돼있다. 5인의 방통위 상임위원은 대통령이 위원장을 포함해 2명을 지명하고, 나머지 3명은 국회(여당 1명, 야당 2명) 추천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는 구조다. 윤 대통령은 앞서 5월 TV조선 재승인 심사 점수 변경에 관여한 혐의로 기소된 한상혁 위원장에 대한 면직안을 재가하면서 위원장 자리는 당분간 공석이 됐다. 한상혁 위원장의 본래 임기는 올해 7월까지였다. 차기 방송통신위원장으로는 이동관 대통령실 대외협력특보가 유력하다. 더불어민주당이 추천한 최민희 전 의원은 3월 임명안이 통과됐지만, 결격사유에 대한 법적 해석을 둘러싸고 대통령의 재가가 중단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