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가에 여풍(女風)이 거세다.
유통업계는 물론 재벌 대기업에서 딸이 경영에 참여한 사례는 드물다. 삼성가의 이부진 사장과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 정도를 제외하면 2000년대 이후 여성 오너 경영인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마저도 남편과 함께 부부경영을 펼치거나 기업이 운영하는 문화 예술 분야에 국한된 사업을 이끄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근들어 딸들의 행보가 달라지고 있다. 그림자 같은 역할에 그쳤던 과거에서 벗어나 기업을 진두지휘하고 당당히 승계자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구지은 신임 대표는 아워홈에서 수년간 임원으로 재직하며 외식사업 등을 진두지휘해 경영능력을 인정받았다. 오빠인 구 전 부회장의 경우 LG경제연구원에 재직했으나 이전까지 아워홈 경영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구 대표 입장에서는 낙하산 인사를 묵과할 수 없었다. 당시 구 대표는 외식업을 분사한 캘리스코 대표로 자리를 옮겨 와신상담했다. 그리고 5년만에 구 전 부회장의 실적 부진과 보복 운전 등 사회적 물의가 겹치자 자매들이 의기투합해 왕좌 탈환에 성공했다. 아워홈은 구지은 대표 취임과 함께 언니인 구명진 씨도 캘리스코 대표에 오르며 범 LG가에 '자매 경영' 시대의 포문도 열었다. 아워홈의 지분은 구 전 부회장이 38.6%로 가장 많지만 세 자매의 지분을 합치면 59.6%에 이른다. 자매들이 뭉치면 언제든 장남을 해임시킬 수 있는 구조였던 셈이다.
대상그룹 임창욱 명예회장과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은 일찍부터 딸들에게 경영수업을 시켜왔다. 이들 기업의 공통점은 아들 없이 자매만 두었다는 점이다. 과거엔 기업들이 딸 대신 사위에게 경영승계를 해왔다면 대상과 아모레퍼시픽 회장의 선택은 달랐다. 유통기업 중 대표적인 사위경영 기업은 해태제과와 골든블루를 꼽을 수 있다.
코넬대를 졸업하고 경영컨설팅 기업 베인앤컴퍼니에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한 서민정 씨는 2019년부터 아모레퍼시픽에 합류해 아모레퍼시픽 뷰티영업 전략팀 과장으로 재직 중이던 지난해 세기의 결혼 이후 올해는 이혼으로 또한번 화제에 올랐다. 서 과장은 서경배 회장에 이은 아모레퍼시픽그룹 2대 주주다. 서 과장의 아모레퍼시픽그룹 지분은 2.93%이며 계열사인 이니스프리(18.18%)를 비롯해 에뛰드와 에스쁘아의 지분도 각각 19.52% 보유했다.
패션 산업은 딸들의 경쟁이 특히 치열한 업종이다. 중견 패션기업인 형지, 세정, 한세엠케이, 영원무역의 2세 딸들은 각각 계열사 대표에 올라 경영능력을 검증받고 있다. 이들은 유사한 시기에 계열사 대표로 선임되며 패션업계의 여성 경영인 경쟁에 불을 지피고 있다는 평가도 받는다. 형지 최병호 회장의 장녀 최혜원 형지I&C 대표는 디지털 경영으로 젊은 형지를 표방하고 있으며, 김동녕 한세예스24그룹 회장의 막내 딸인 김지원 씨는 한세엠케이 대표 겸 한세드림 각자 대표에 올랐다. 세정 박순호 회장의 삼녀인 박이라 씨는 2019년 세정과미래의 사장으로 승진해 회사를 이끌고 있다.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의 차녀인 성래은 영원무역홀딩스 대표는 실적은 물론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에 동참하며 여성 2세 경영의 성공사례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