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실제로 점을 쳤느냐는 유가(儒家)에서의 오랜 논쟁거리였다. 덕을 행함으로써 점치는 것을 대신했다는 이덕대점설(以德代占說)과 점을 친 적이 없다는 부점론(不占論)에서부터 공자는 스스로 직접 점을 쳤고 또 그 결과를 믿었다고 보는 공자서점설(孔子筮占說) 등 견해가 크게 엇갈렸으며 유학자들이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왔다.
유교의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하나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하는 것일까. 춘추시대의 정자산처럼 하면 될 것이다. 성명은 공손교(公孫僑), 자산(子産)은 그의 자다. 정(鄭)나라 목공의 손자여서 흔히 정자산이라 부른다. 정은 소국인 데다 진(晉)과 초(楚)라는 강대국 사이에 끼어 줄타기 외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자산은 기원전 547년 재상에 임명돼 기원전 522년 세상을 뜨기까지 정치를 혁신하
우두머리가 너그럽기만 하면 그 나라, 그 조직은 문란해지기 쉽다.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조화돼야 한다. 그렇게 조화를 이루는 것을 관맹상제(寬猛相濟)라고 한다. 관이제맹(寬以濟猛) 맹이제관(猛以濟寬)도 비슷한 말이다.
중국 춘추시대 정(鄭)의 정치가 공손교(公孫僑:정자산)는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대신 자태숙(子太叔)에게 먼저 너그러운
모든 것이 생긴 대로 비치는 거울처럼 맑고 고요한 물이 명경지수(明鏡止水)다. ‘장자(莊子)’ 덕충부편(德充符篇)에 이런 말이 있다. 죄를 지어 다리를 잘린 왕태(王?)라는 인물의 제자가 공자의 제자 수와 맞먹었다. 인기가 높은 이유를 제자들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은 흘러가는 물에는 비춰 볼 수 없고 고요한 물에 비춰 보아야 한다. 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