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명종, 선조 때의 영의정 이양원(李陽元, 1526~1592)이 쓴 시에 나온다. “높으나 높은 나무에 날 권하여 올려두고/ 이보오 벗님네야 흔들지나 말았으면/ 떨어져 죽기는 섧지 않아도 님 못 볼까 하노라.”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피란 간 뒤 한양을 지켰던 그는 임금이 의주를 버리고 요동 땅으로 갔다는 소문이 들리자 임금이 나라를 버렸다는 수치심에 단식을 시작...
그러면서 “대전은 제가 30년 넘게 살아온 지역이자 우리 아이들의 고향이기에 어떤 정치인이 필요한지, 지역 민심 요구가 무엇인지 잘 안다”면서 “저는 국민을 저버린 윤석열 정권에서 ‘망이 망소이’(고려 명종 때 과도한 부역과 차별 대우에 항의해 봉기를 일으킨 농민)가 되는 길을 가겠다”고 했다.
앞서 민주당 중앙당 공직선거후보자 검증위원회는 지난해...
삼척 죽서루는 고려 명종 시절 활동했던 김극기라는 문인이 죽서루의 풍경을 시로 썼던 것으로 볼 때, 적어도 12세기에는 창건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죽서루의 뜻은 동쪽에 죽장사(竹欌寺)라는 절이 있어서 그 서편에 위치한 누각이라는 의미다.
죽서루의 절경을 표현한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을 비롯해 정선, 김홍도, 강세황 등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
영결식은 명종 5타를 시작으로 개식, 삼귀의례, 영결법요, 헌다헌향, 행장소개, 영결사, 법어, 추도사, 조사, 헌화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정부는 자승 스님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기도 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은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 분야에 공을 세워 국민의 복지향상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국민훈장(5등급) 중...
삼척 죽서루는 고려 명종 시절 활동했던 김극기라는 문인이 죽서루의 풍경을 시로 썼던 것으로 볼 때, 적어도 12세기에는 창건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조선 후기 증축된 이후의 모습이 현재까지 잘 보존돼 있다.
밀양 영남루는 통일신라 때 세운 '영남사'라는 절에 있던 작은 누각에서 시작됐다. 이후 고려 때 절은 폐사되고 누각만 남아 있던 것을 공민왕 시절...
조선 명종 15년에 풍기 문란으로 답교놀이가 금지됐다고 하는데, 조선 실학자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에 의하면 ‘남녀가 쌍쌍이 짝을 지어 밤새도록 돌아다니면서 밤새우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사헌부가 이를 금지하고 잡아가기에 이르렀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날 남녀가 서로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아이컨택트 시간이 바로 답교놀이였다는 것이죠.
여자들의 구애인...
비싼 재료가 많이 들어가는 약과를 두고 명종은 약과 제조 금지령을 내립니다. 약과를 만드느라 곡물, 꿀, 기름 등을 너무 많이 사용하는 바람에 물가가 올라 민생이 어려워졌다는 이유였죠. 이후 공민왕도 같은 이유로 약과를 만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사치품이 오늘날은 이렇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간편한 과자가 된 셈이죠. 현재 이 약과는 세상의 모든 디저트를...
몸을 닦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네 임금(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을 모시며 영의정을 지냈으나 초가집 한 칸뿐이었을 정도로 청렴한 조선 중기 문신. 류성룡(柳成龍)마저 이순신(李舜臣)을 버릴 때 홀로 그를 엄호했고, 광해군의 폐모살제(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임)를 반대했을 뿐 아니라, 인조가 광해군을 참하려는 것을 막아낸...
12년이 채 안 되는 벼슬살이 기간이었지만 율곡 이이는 명종·선조에게 수없이 글을 써 올렸다.
율곡은 왕의 면전에도 직언과 고언을 쏟아낸 인물이었다. "흥성했던 시기로 돌려놓겠다는 뜻을 세우고 학문을 통해 뜻을 강하게 하고 공정한 도량을 넓히고 현명한 선비들로부터 훌륭한 조언을 받고 신하가 임금께 말을 아뢸 때 시간에 구애되지 말고 직접 아뢰게...
고려 명종 3년(1173) 김보당의 난을 극복하려고 조응대선사가 발원하고 1185년 조성했으며, 이후 수차례 수리를 거쳤다. 건축 양식은 공포(지붕 하중을 받치기 위해 만든 구조물)가 여러 개인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전반적으로 17세기 후반 모습을 간직했으나 일부 여말선초(麗末鮮初) 수법이 남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장전과 윤장대가 있는 용문사는 신라 경문왕(재위...
강릉(명종과 인순왕후 릉) 능침공간 답사’ △정정남 건축문헌고고스튜디오 대표연구원의 ‘조선왕릉 건축제도의 변화’ △김은선 대전시립박물관 선사팀장의 ‘조선왕릉 석물조각과 태릉·강릉 석물의 비교’ 등이다.
이번 강좌는 ‘지역행복생활권 조선왕릉 문화벨트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서울 노원구・성북구, 경기도 구리시・남양주시 등 4개의 지자체가 연계...
명종 때 노극청이라는 관료의 아내는 은 9근에 집을 사서 12근에 파는 수완을 발휘했다는 기록이 있고, 무신정권의 실력자 정존실은 혁대를 만드는 장인인 언광의 집을 은 35근에 사기로 했다고 씌어있다. 고려 후기에는 충선왕이 안향의 집을 은 50근에 사서 권세가 권준에게 준 일도 있었다. 당시 은 한근의 값은 삼베 백 필과 같았는데, 이는 일반 백성의 1년 연봉에...
이날 오전 10시 명종, 삼귀 의례, 영결법요, 헌다·헌향, 행장 소개로 시작된 영결식은 영결사와 법어, 추도사, 조사, 조시 순으로 이어졌다.
영결식에는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과 총무원장 설정 스님 등 많은 스님과 불자들이 참석해 무산 스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무산 스님은 193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939년 출가해 불교신문 주필,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홍국형 씨 별세. 홍경련, 주표(사업가), 기범(경기소방 공무원), 기백(현대제철 부장), 명종(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준호(교보증권 자산운용부장) 씨 부친상= 26일일 오전 10시 35분, 경기도의료원 수원병원 장례식장 8호실, 발인 28일 오전 10시, 장지 수원 연화원, 031-888-0708.
사건이 일어난 1188년(명종 18)은 무신 집권기였다. 탄탄한 신분제도를 자랑하던 고려의 문벌 귀족사회는 1170년 무신정변이 발발하면서 크게 변하였다. 집안 좋던 문신들은 거의 다 죽임을 당했으며, 조정에는 천인(賤人)들이 넘쳐났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노비의 아들 이의민(李義旼)으로, 1188년은 바로 이의민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무신들의 집권은 수탈에 고통 받던...
그녀의 할아버지 명종은 1170년 무신란으로 정중부 등 무인들에 의해 옹립되었다가 1197년 최충헌에 의해 폐위 당했다. 아버지 강종은 명종이 폐위될 때 강화도로 내쫓겨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 60세인 1211년에야 다시 최충헌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그 사이 최충헌은 신종과 희종 두 명의 왕을 더 갈아치웠다.
이런 무시무시한 최충헌, 그녀 가족의 원수라고도 할 수...
1487(성종 18)∼1557(명종 12). 조선 11대 왕인 중종의 비이다. 본관은 거창으로 아버지는 익창부원군 신수근(愼守勤)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 한충인(韓忠仁)의 딸이다. 슬하에 자녀는 없다. 할아버지는 신승선(愼承善)이다. 연산군의 부인 폐비 신씨와 아버지 신수근이 남매이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며 중종의 장인이 되고, 폐비 신씨는 단경왕후의 고모가 된다....
한편 서하준은 지난해 11월 종영한 MBC 드라마 '옥중화'에서 명종 역으로 출연했다. 그러나 같은 해 '몸캠 동영상 루머'에 휩싸이며, 잠시 방송 활동을 중단한 바 있다.
2008년 연극 '죽은 시인의 사회'으로 데뷔한 서하준은 '오로라 공주' '사랑만 할래' '내 여자의 사위'등에 출연했다.
문정왕후어보는 명종 2년(1547년)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에게 ‘성렬대왕대비(聖烈大王大妃)’라는 존호(尊號·덕을 기리는 칭호)를 올린 것을 기념해 제작됐다. 가로·세로 각 10.1㎝, 높이 7.2㎝ 크기로 금으로 제작됐으며, 거북 모양 손잡이가 달렸다. 현종어보는 효종 2년(1651년) 임금의 맏아들인 현종이 왕세자로 책봉됐을 때 제작돼 ‘왕세자지인(王世子之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