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환의 Aim High] 1000년 묵은 여우, 서울 집값

입력 2018-08-28 10:55 수정 2019-01-07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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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경제부장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 한 무리의 백성이 대궐 밖 문루에 몰려와 신문고를 울리니 임금이 나와 무슨 일인지 물었다. “한양 집값이 비싸 사지 못하고 세를 들어 사는데, 그마저도 너무 올라 감당할 수 없으니 통촉하옵소서”.

임금은 “어허 이런 변이 있나. 좌찬성과 도승지를 들라 하라” 명했다. 조정은 주상의 명에 따라 사람이 살지 않는 산 밑의 땅을 개간한 뒤 분양하고 땅을 사들여 집이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 팔거나 빌려줬다. 또 빈집을 사들여 여러 가구로 나눠 임대했다.

하지만 추상같은 나랏님의 명에도 집값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돈 있는 양반들이 시세 차익을 노리고 하급관리와 중인들의 집을 여러 채 사들였기 때문이다. 조정은 다주택자의 주택 구매를 막기 위해 사대부는 사대부끼리만, 중인은 중인끼리만 주택을 사고 팔 수 있도록 규제를 가했다. 1가구 1주택 정책도 전격 발표했다. 그러자 양반들은 여러 채 구입한 집을 중인들에게 임대했다는 임대차계약서 위조로 맞섰다. 조정도 질세라 조선팔도의 세입자 현황 전수조사에 나서며 다주택자를 몰아세웠다. 하지만 양반들은 집에 데리고 있던 노비를 중인 신분으로 높여주며 계약서 위조에 가담시켰다. 결국 조정의 땜질식 처방은 주택투기만 부추겼고, 돈 없는 백성들의 주거난은 심해져만 갔대나 뭐래나....

요즘 부동산 상황을 풍자해 지어낸 이야기라면 좋겠다. 하지만 조선 중기 한성부(한양)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충격실화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741년(영조 17년) ‘어의동 본궁 담장 밖에 사는 군병들이 집단으로 비변사에 집세를 감해줄 것을 요청하는 소지(所志))를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 실록에는 비슷한 내용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왕들은 이 때마다 집세를 감해주는 한편 다양한 주거안정대책을 펴며 집값 잡기에 나섰지만, 조선왕조 500년간 부동산 대책은 실패를 거듭했다. 예컨대 지금의 신도시 개발쯤에 해당하는 산지 개간 사업은 집값 양극화만 낳고 말았다. 기록에 따르면 새로 개발한 남산골 지역은 사대부들에게 외면당했고, 사실상의 빈민촌으로 전락했다. 당시 이 곳에 사는 서민들을 일컫는 ‘남산골 선비’라는 비아냥이 생겨나 유행했다고 하니 지금 말로는 ‘흙수저’쯤 되지 않을까 싶다. 서민들이 살던 남산골 집값은 말단 관직인 정9품 관료 녹봉의 2년치에 불과했는데, ‘조선의 강남’이었던 인사동 집값은 50년치에 달했다. 숨만 쉬고 50년치 월급을 모두 모아야 인사동 집을 살 수 있었던 셈이니 당시의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강남 입성’은 대를 이어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게 분명하다.

당시는 조선의 중흥을 이끈 것으로 평가받는 영조대왕 시절이다. 실학사상과 개혁정책으로 국가를 재정비했지만 경제, 특히 부동산 분야는 신통치 못했던 모양이다. 영조시절은 상인들의 독·과점이 심해져 물가가 급등하고 한양의 주거시설 부족을 해결하지 못해 집값이 크게 올랐던 때로 기록돼 있다. 영조가 부동산에 관해 특별히 무능했던 탓일까. 시계를 더 과거로 돌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활발한 해상무역으로 부를 쌓았던 고려에 관한 문헌들에 따르면 12세기 수도 개경의 기와집 한 채 값은 대략 은 10근에서 50근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명종 때 노극청이라는 관료의 아내는 은 9근에 집을 사서 12근에 파는 수완을 발휘했다는 기록이 있고, 무신정권의 실력자 정존실은 혁대를 만드는 장인인 언광의 집을 은 35근에 사기로 했다고 씌어있다. 고려 후기에는 충선왕이 안향의 집을 은 50근에 사서 권세가 권준에게 준 일도 있었다. 당시 은 한근의 값은 삼베 백 필과 같았는데, 이는 일반 백성의 1년 연봉에 해당했다한다. 그런데 서민들은 삼베 한 필의 저축도 없었다고 하니 개경에 집 한 채 사려면 역시나 수십년치 연봉을 한 푼도 안쓰고 모아야 할 지경이었다. 궁성에서 가까울수록 집값은 높았고 고관대작이 모여 살던 ‘정승동’의 경우 집값이 특히 더 비쌌다.

1000년 전인 이 때도 다주택자는 있었고, 내 집이 없어 세를 내고 사는 세입자들의 고통 또한 다를 바 없었다.

고려 명종은 농민 출신인 백임지라는 인물의 출중한 무예에 매료돼 형부시랑의 벼슬을 내리며 개경으로 불러 올렸다. 하지만 개경에 무릎 꿇을 땅 한 조각 없던 백임지는 세를 살아야 했고, 비싼 집세를 감당하지 못해 한동안 땔감을 해다 팔며 근근이 입에 풀칠을 했다 한다.

현대의 ‘떳다방’이나 집값 담합과 닮은 시세조작도 5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다. 정조 시절 남대문 근처에 살았던 선비 유만주가 남긴 일기 ‘흠영(欽英)’에는 ‘집주릅(부동산 중개업자)’의 농간이 등장한다.

집주릅은 계약이 성사되기 직전에 집값을 올리는가 하면 이사 날짜까지 잡힌 거래를 취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거래가 되지 않는 것은 집 살 사람이 망설였기 때문이라고 책임을 떠넘긴다.

집주릅에 끌려다니던 유만주는 결국 원래 살고 싶던 경희궁 근처 대신 엉뚱한 곳인 명동의 집을 구매하고 말았다. 그것도 시세보다 한참 비싼 값을 줘야했다. “다른 사람이 집을 보러 오기로 했으니 지금 계약 안하면 못 산다”는 집주릅의 말재간에 넘어간 결과였다.

500년이 아니라 5일 전 일이라 해도 믿을 법한 이 사건을 두고 유만주는 “집을 사는 일이 참으로 어렵구나. 모두 이와 같다면 어떤 이가 사려하겠는가?”라고 개탄하는 글을 남겼다.

수급을 무시한 정부의 섣부른 개입이 부르는 결과는 1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고 부동산 시장과 다주택자들의 영악함 역시 오히려 현대를 넘어선다. 비록 죽은 자들의 말과 글에 불과할지라도, 나라가 시장을 이겨먹었다는 기록은 찾지 못했다. 무신정권도, 절대군주도, 동양척식주식회사도, 군사정부도 예외가 없었다. 유사 이래 첫 역사에 도전하는 현 정부의 노력에 기대를 걸어야할지, 혀를 차야할지 망설여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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