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 경인로엔 오래된 상가 건물이 많다. 그중에서도 더 낡고 허름해 보이는 건물이 있다. 건물 안 낡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샌드백 두드리는 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복싱 체육관이다.
평일 저녁 7시. 체육관이 한창 붐벼야 할 시간이지만 젊은 남성 한두 명만이 샌드백을 두드리며 땀을 흘리고 있을 뿐이다. 불과 10여년 사이 인기종목에서 극심한 비인기 종목으로 전락한 프로복싱의 시대적 한계를 보여준다. 서글픈 일이다.
사실 이 체육관은 한국 스포츠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 현장이다. 국내 최초 여성 복서이자 세계챔피언 김주희(28ㆍ거인체육관)의 인생 스토리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김주희는 서울 영등포의 문래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지난 2001년 정문호(54) 거인체육관 관장을 만나 복싱을 배웠다. 찢어지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견디기 힘든 배고픔과의 싸움은 일상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구멍가게에서 빵을 훔쳐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 두 딸(김주희와 현재 미국 거주 언니)을 두고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뇌출혈로 쓰러졌고, 남겨진 두 딸은 노숙자신세가 됐다. 갈 곳을 잃은 자매가 찾아간 곳이 이곳 거인체육관이다. 그때부터 체육관은 김주희의 집이자 학교이자 놀이터가 됐다. 김주희에게 복싱은 유일한 희망이자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였다.
가난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이 간절했던 걸까. 평소 순한 양이던 김주희는 링에 오르는 순간 독사가 됐다. 입문 2년 만에 한국챔피언이 된 김주희는 1년 뒤인 2004년에는 IFBA 주니어 플레이급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김주희의 승승장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강펀치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전 세계 내로라는 여성 파이터들은 김주희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무려 11개 기구 통합 챔피언이라는 전무후무 기록을 남길 때까지 김주희를 넘을 수 있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인 첫 세계챔피언 김기수(1966)를 시작으로 홍수환(1974), 유제두(1975), 장정구(1983), 유명우(1985), 박종팔(1987)로 이어진 한국 프로복싱 황금기의 주인공은 전부 남성이다. 그때만 해도 복싱은 몇 안 되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김주희를 한국 여성 스포츠의 개척자라 부르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나 김주희에게도 넘지 못한 산이 있었다. 후원 기업의 외면이다. 김주희는 올해로 프로데뷔 14년째지만 링에 오른 것은 20회(18승 1무 1패 7KO승)에 불과하다. 1년에 1.67회 경기한 셈이다.
세계챔피언이 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타이틀 방어전을 위해서는 약 2억원의 후원금이 필요하다. 가장 최근에 치른 경기는 지난 2012년 12월에 열린 타이틀 방어전이다. 대기업과 금융사, 대학교, 지자체 등 후원으로 약 1억5000만원을 모았지만, 나머지 5000만원은 김주희와 거인체육관에서 부담해야 했다.
그렇다면 김주희는 지금까지 얼마나 벌었을까. 정문호 관장은 “김주희가 거지라면 누구도 믿지 않는다. 세계챔피언인데다 TV나 각종 미디어를 통해 얼굴도 많이 알려졌다. 그래서 더 안 믿는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당연하다. 한때 11개의 챔피언벨트를 보유한 거물이 아닌가.
그러나 김주희가 세계챔피언이 된 2000년대 중반은 한국 프로복싱이 극심한 침체기에 접어들던 시점이다. 한국 여성 스포츠의 개척자로서 ‘금녀의 벽’을 허문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기록되고 있는 김주희가 얻은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니었다.
정문호 관장은 “정확한 액수는 모르겠지만 주희 통장에 수백만원의 잔고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게 전 재산이다. 세계챔피언이 된 이후에도 미국에 거주하는 언니로부터 생활비를 받아 아버지 병간호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스포츠, 특히 극도로 소외된 프로복싱의 어두운 이면이다.
여성을 바라보는 온갖 편견을 깨고 한국 여성 스포츠의 개척자로 이름을 알린 김주희는 2000년대 중반부터 불어닥친 프로복싱 인기 하락과 스폰서 난에 휩쓸려 날개를 활짝 펴지 못한 비운의 개척자로 기록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