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 독자가 도란도란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질문하고 답하는 북 콘서트를 연상하면 오산이다. 장소부터 다르다. 서점이나 도서관의 한 공간이 아니라 호화스러운 웨딩홀이거나 심지어 수천 명을 수용하는 체육관에서도 한다. 축사도 길고 저자의 인사말도 웅변조에 가깝다. 대개는 북적이는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고 책도 몇 천 권쯤 한꺼번에 훌쩍 동이 난다. 짐작하겠지만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다. 요즘 각 지자체에서는 코앞에 닥친 지방선거를 앞두고 하루가 멀게 이런 진풍경이 벌어진다.
아시다시피 글을 쓰지 않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들이 정치인이다. 정치인 중에도 간혹 탁월한 저술가들이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충실한 기록으로 남기는 정치인을 찾아보기란 흔한 일이 아니다. 소위 국회의원을 3선, 4선씩 하고, 장·차관을 한 사람들도 외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회고록 한 권 남기지 않는 게 대한민국 정치인들이다.
그런데 요즘 글 쓰는 정치인이 급격히 늘었다. 시장이나 도지사, 교육감 후보도 쓰고, 지방의원 후보도 쓴다. 선거법 때문이란 게 정설이다. 선거법이 워낙 까다롭고 엄격하다 보니 선거를 앞두고 출마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반 없는 모양이다. 그나마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출판기념회라는 것이다.
짐작컨대, 출판기념회가 출마자들에게 선사하는 몇 가지 득이 있을 수 있겠다. 공식 선거운동 전에 자신의 출마를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알리는 게 가능하고, 책을 판매할 수 있으니 동원한 사람이 많으면 선거 자금을 마련하는 데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입후보자들이 빈틈을 찾아 움직이다 보니 또 다른 부작용이 있는지 정치권 일각에서는 또 이를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얼마 전 여당 대표도 다음 선거에서는 출판기념회를 규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사람들을 동원해 책을 판매한다는 이유 때문인지, 사전 선거운동이 되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부작용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오히려 장려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불법적 선거자금이 오고가는 것만 아니라면 책을 사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들겠는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을 위해 여러 사람이 책을 사서 읽고 조금씩 선거자금을 만들어주는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문제는 책이다. 언제부터 수필 쓰는 정치인이 그렇게 많았는지. 천편일률적으로 뜬구름 잡는 얘기들이 대부분인 데다, 자기 자랑을 빼면 단 한 줄도 기억에 남지 않을 책을 사 달라고 강요하는 꼴이 되면 우습지 않은가. 그나마 자기 손으로 쓴 경우라면 진정성이라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자기 이름조차 쓰지 않고 대필에 의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얘기가 들린다. 이는 일종의 속임수요, 유권자에 대한 배신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런 몰지각한 사람들이 정치를 하겠다는 통에 정치인들의 책은 이른바 ‘선거용’이라는 이름으로 매도되고 가끔 나올 수 있는 좋은 저술도 도매금으로 넘어간다.
최근 접한 한 지방의원의 저술은 흔히 보기 어려운 좋은 책이었다. 지난 4년간 시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매일매일 적어 온 의정 일기였다. 자신의 의정활동 내용을 홈페이지에 올리거나 SNS를 활용해 시민들과 소통했던 내용을 그대로 엮었는데, 그 자체로 아주 탁월한 기록물이요, 시정 정보의 보고였다. 책을 본 사람들이 말했다. “시청에서, 시의회에서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더라.”
정보에 접근하는 일 자체가 쉽지 않은 주민들에게, 현실을 개선하려는 시민단체에, 새로운 정치를 꿈꾸는 정치 지망생들에게 교과서로 읽혀도 전혀 손색 없는 저작물이었다. 앞서간 사람 누군가의 경험이 기록되지 않아 축적이 불가능했던 우리 사회에 분명 표본이 될 수 있는 책이었다. 이런 책이 하필이면 이런 때 출간돼 ‘선거용’이란 딱지를 붙여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게 안타까웠다.
이런 경우, 특히 유권자들의 안목이 필요하다. 알곡과 쭉정이를 거르는 유권자들의 냉철한 태도가 정치를 한 걸음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정치를 하는 데 규제만이 능사는 아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법을 만들어 규제하려는 태도, 내 눈에는 너무 쉽게 법에만 의존하려는 정치권의 태도가 더 위태로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