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변호인’ 속 부림사건(1981년 공안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들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 감금하고 19명을 기소한 사건)이 2014년에 재현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33년 전만큼 적극적이고 활발한 독서모임 자체가 대학교에 많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는 한국 대학생의 가방은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교육통계센터에서 발간한 2013 교육통계연보를 살펴보면, 국내 대학의 도서관 수는 2000년과 비교해볼 때 493개에서 626개로 21% 증가했다. 보유 장서 수도 7025만여권에서 1억3374만여권으로 90%나 늘었다. 그러나 정작 책을 빌려보는 학생은 크게 줄고 있다.
2012년 기준 국내 대학생이 도서관에서 1년간 빌리는 책은 평균 9.6권으로, 미국과 캐나다의 북미연구도서관협회 평균 15권에 미치지 못한다. 국내 최다 대출 건수를 기록한 서울대는 평균 32권의 대출 권수를 기록했지만, 이 역시 미국 예일대의 46권과 비교하면 한참 모자라는 수치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를 탄생시킨 괴테는 “독서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80년이라는 세월을 바쳤는데도 아직까지 그것을 잘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괴테도 모르는 독서의 왕도(王道)를 대학생이 모르는 건 당연지사다.
왕성한 식욕으로 아무 책이나 집어삼키는 것도 독서의 한 방법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연주를 듣다 보면 나쁜 연주를 금방 판별하지만 잡다하게 들으면 좋은 연주를 들어도 모르기 때문에 좋은 영화만 봐야 한다”는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말을 독서법에도 적용해보자.
최근 발표된 ‘대학신입생 추천도서’ 20종은 독서 시작의 좋은 지침서가 된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하 출판진흥원)은 대학 입학을 앞둔 신입생들의 기본 소양 형성에 도움을 주기 위해 매년 ‘대학신입생 추천도서’를 선정해 발표한다.
출판진흥원 함소아 대리는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매년 꼭 읽어야 할 책이 있고, 매년 읽어야 할 책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며 “이를 반영하기 위해 ‘좋은책선정위원회’가 신ㆍ구간 전 범위를 대상으로 권장도서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2014년에 발표된 20종의 도서는 총 소설 6종, 인문ㆍ철학 5종, 정치ㆍ사회 3종, 시ㆍ수필 3종, 과학 2종, 역사ㆍ문화 1종으로 구성됐다.
소설 분야에는 박경리의 ‘토지’ 전 20권이 이름을 올렸다. ‘토지’는 한국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민중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다양한 인간 군상과 반세기에 걸친 장대한 서사, 참다운 삶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등이 돋보이는 이 책은 최근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는 현 사회를 이끌 대학생들에게 의미있는 길을 안내할 것이다.
정치ㆍ사회 분야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유엔(UN)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인 장 지글러가 기아의 실태와 원인을 설명했다. 기아의 원인을 깊숙이 파고든 이 책은 인간의 생사를 가르는 상황들이 얼마나 정치ㆍ경제 질서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나를 여실히 드러낸다.
대학 새내기들은 전쟁과 정치적 무질서로 인해 구호 조치가 무색해지는 현실, 소는 배불리 먹으면서 사람은 굶은 모순된 현실 등을 살필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사람이 가져야 할 인정과 지구촌 일원으로서의 당연한 도리를 깨닫도록 돕는다.
비교적 신간에 속하는 인문ㆍ철학 분야의 ‘삶을 바꾼 만남-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은 정약용과 황상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다산 정약용의 삶과 학문적 업적, 문화사적 의미를 밝힌 책이다. 대학 신입생들은 조선시대의 전방위적 지식인인 정약용의 삶을 통해 참된 지식의 방향을 다잡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대학신입생 추천도서’ 20종의 목록이다.
- 소설: ‘1984’, ‘독일인의 사랑’, ‘에코토피아 뉴스’, ‘죄와 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토지’(전20권)
- 인문ㆍ철학: ‘군주론’, ‘논어’, ‘대담’, ‘삶을 바꾼 만남’, ‘일의 발견’
- 정치ㆍ사회: ‘긍정의 배신’, ‘상상의 공동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시ㆍ에세이: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무소유’,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 과학: ‘시간의 역사’, ‘이기적 유전자’
- 역사.문화: ‘역사평설 병자호란’(전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