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한 여신심사로 대출사고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에 한 시중은행 여신담당 부행장이 한 말이다.
지난 수십년간 부실 불법대출로 은행, 저축은행, 상호금융 등 금융회사들이 대거 퇴출됐다. 금융회사는 투명하고 합리적인 여신심사 시스템을 도입하겠다며 수차례 여신심사 체계를 개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최근 매출채권을 이용한 대출사고가 연이어 발생해 은행 여신심사 시스템에 구멍이 뚫렸다는 비판의 목소리 높다.
특히 KT ENS 직원과 협력업체들이 연루된 5000억원대 대출사기 사건은 은행의 내부통제 시스템의 허점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이 사건에 연루된 관계자들이 여러 금융회사를 돌며 사기행각을 벌였지만 사고 은행의 여신심사 시스템은 문제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 거액의 여신을 제공했다.
◇ 여신위서 대출 여부 결정…은행장 직간접 개입 = 은행의 여신심사 시스템은 과거에 비해 체계화·전산화돼 있다. 개인대출의 경우 소득, 부채, 신용등급은 물론 심지어 근무회사 규모와 재직기간 등 세부항목까지 고려한 여신심사 시스템을 통해 대출이 이뤄지고 있다.
여신심사가 전산화되다 보니 대출담당자의 개인 부정 대출이 이뤄지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다 보니 가계대출 연체율이 0.66%에 불과하다.
문제는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의 대출이 이뤄지는 기업여신이다. 현재 은행들은 여신심사위원회(여신위)를 통해 대출 가능 여부를 결정하고 있다.
여신담당 부행장이 위원장을 맡고 관련 부장들로 구성된 위원에서 투표를 통해 여신을 결정하고 전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 은행장은 원칙적으로 대출 심사과정에서 배제된다.
다시 말해 여신·리스크 관리·자금담당 임원과 간부 6~8명으로 구성된 여신위가 모든 걸 결정한다는 것이다. 과거 은행장 또는 여신담당 최고 임원, 부장이 전결로 대출하던 것을 여신위를 통한 협의체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이는 대출 책임에 있어 은행장 개인에서 집단방어 체제로 변경했다는 점도 큰 변화다.
외환위기 당시 대규모 대출 비리가 발생해 은행장들이 줄줄이 구속되자 금융당국이 은행장의 여신심사 전결권을 없앤 것이다.
그러나 은행장이 여신위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부실 대출에 따른 관리 책임을 져야 하는 만큼 직간접적으로 관여할 수밖에 없다는 게 금융권 관계자의 전언이다. 특히 거액의 기업여신의 경우 은행장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 구조화 여신 문제점 여전히 노출 = 지난해 금융감독원이 은행장을 여신위에 다시 포함시키는 방안을 놓고 은행권과 대립각을 세운 적이 있다. 금감원은 일정 규모 이상이나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대출 시 은행장이 직접 참여하고 책임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은행권은 은행장이 대출에 관여하게 되면 외부 청탁과 민원이 늘어나 부실 대출이 더 악화될 것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그러나 잇따른 대출사고로 은행장의 실질적 권한에 대한 책임론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은행장이 공식적으로 여신심사에 관여토록 하고 그에 걸맞은 책임을 부여함으로써 여신이 실행된 이후 사후관리에도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5000억원 대출사기는 해당 은행 여신위 의사결정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나·국민·농협은행의 경우 대출사기 사건에 휘말렸지만, 우리·IBK기업은행 등은 ‘위험 요인이 많다’며 대출 불가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피해 은행의 경우 여신심사가 형식적으로 진행됐으며 심사 과정에 외부 청탁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게 금융권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전문가들도 은행 여신심사 시스템에 대한 전면 개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 은행 심사역은 “아직까지 미완성이지만 여신심사는 책임 추궁 문제가 뒤따르고 실적을 평가해 성과급이 지급되므로 비합리적 의사 결정에는 이의를 제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