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또는 본인)과 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로도 불리는 이 이론에 따르면 주인은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 대리인은 일단 일을 맡으면 정보 면에서 주인을 압도하게 된다. 이런 정보의 비대칭성을 이용해 악질 대리인은 주인의 이익에도 반하는 일까지 저지를 수 있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유진 파머 시카고대 교수는 법학에서 출발한 이 이론을 경제학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했다. 그는 1980년 '대리인 문제와 기업이론'(Agency Problems and the Theory of the Firm)이란 글에서 경영자가 주주의 대리인이란 지위를 망각하고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에 몰두할 수 있으니 주주는 대리인2를 보내 경영진의 ‘장난’을 견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주장은 90년대 성행했던 주주 행동주의의 이론적 배경이 됐다.
그가 시장의 효율성을 강조하고 정부의 개입을 반대해 온 시카고학파의 대표 학자이며 시장의 자율적 능력을 신봉하는 ‘효율적 시장이론’ 제창자란 점을 고려하면 특이한 주장임에 분명했다. 보이지 않은 손이 작동하기라도 하듯 시장은 저절로 척척 움직여야 하지만 실제로는 곧잘 비틀거린다. 그는 이런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대리인의 문제에서 찾았다. 그만큼 ‘대리인 비용’이 시장경제를 위협하는 중대 위협으로 간주한 것이다.
정부는 11일 공공기관 정상화 방안을 발표하고 566조원에 달하는 공공기관과 지방공기업 부채 문제를 해결하고 방만 경영을 바로잡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제시했다. 현오석 경제부총리는 “이번에는 다르다고 확실하게 약속 드린다”며 “저부터도 솥을 깨고 배를 가라앉힌다는 파부침선(破釜沈船)의 결연한 마음으로 공공기관 정상화라는 시대적인 과제를 소신 있게 추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경제수장의 ‘사즉생(死卽生)’이란 날 선 다짐에도 퍼뜩 믿음이 안 가는 이유는 뭘까? 당장 전후 모양새부터 블랙 코미디나 다름이 없어 신뢰감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 부총리가 지난 달 14일 “파티는 끝났다”며 대대적인 공공기관 개혁을 예고한 이후 오히려 낙하산 파티가 벌어졌다. 마사회 회장과 한국도로공사 사장에 친박계 인사들이 연달아 임명됐다. 정상화 대책이 나온 당일에는 10•30 보궐선거에서 화성갑을 친박계 원로인 서청원 의원에게 내준 김성회 전 의원이 한국지역난방공사 사장으로 선임됐다. 엽관주의의 장점을 인정한다 해도 이런 막가파식 낙하산 인사가 횡행하면 대책의 진정성은 실종되고 만다. 여기에 KBS는 10일 이사회를 열고 수신료를 4000원으로 60% 인상하기로 의결했다.
‘대리인의 딜레마’를 우리 공공기관에 적용하면 어떨까? 아주 고약하다. 주인은 지금까지 3중으로 대리인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공공기관과 감독자인 정부, 정치권이 강철대오처럼 단단한 ‘철의 삼각형’(Iron Triangle)이란 공생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재직 중엔 입의 혀처럼 움직여주고, 퇴직 이후엔 반듯한 자리를 제공하며 이익을 공유해온 것이다. 이처럼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입맛에 맞는 인사를 논공행상 등의 차원에서 낙하산으로 심어놓고, 태생적 약점을 가진 낙하산 인사는 큰 문제 없이 성과만 안고 가려 해 방만 경영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된 것이다.
이투데이는 최근 ‘공기업 개혁, 이번엔 제대로 하자’란 시리즈를 통해 근본적 개혁을 촉구했다. 표피적 처방으로 ‘철의 삼각형’을 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역대 정부가 그랬듯 시작만 요란할 뿐 용두사미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민영화, 구조조정 등 5대 의제 중 적어도 낙하산 인사에 대해서는 대책을 내놓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이 역시 빠졌다. 혹시가 역시나 였다. 역대 정권의 허망한 실패사가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월 당선인 시절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낙하산 인사는 새 정부에선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 “대통령에게 직언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돈다. 직언하다가 좌천을 당해도 오히려 영광으로 여겼던 선비의 기개와 충정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