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대원군은 ‘파격적’ 혹은 ‘서슬 퍼런’이란 수식어만을 연상시키지만 초상화 속의 대원군은 그 서슬이 어디에 숨었는지 의문을 갖게 만든다. 빈틈없는 단아한 노인이 앉아 있을 뿐이다. 정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채제공, 암행어사 박문수, 충신의 상징 정몽주 등이 소개돼 있다.
가장 강인한 인상을 남기는 건 조선 중기의 대학자 우암 송시열의 초상화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왕권에 맞섰다가 급기야 사약을 마시고 죽은 송시열은 기개와 강직의 상징인 인물로 조선 유학사에 큼직한 족적을 남긴 이다. 저자는 우암을 두고 “응시하는 눈초리가 냉랭하고, 눈머리와 눈꼬리는 불그레하다. 저 눈빛으로 ‘임금이 바르게 서야 나라가 바르다’고 외쳤다”고 평한다. 더러는 밋밋한 초상화도 있지만 “나무의 나이는 나이테에 묻고 사람의 이력은 얼굴에 물으라”는 옛말을 생각하게 하는 그림들이 대부분이다.
이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돼 있다. △같아도 삶 달라도 삶 △마음을 빼닮은 얼굴 △든 자리와 난 자리 △있거나 없거나 풍경 등 네 가지 소제목이 달려 있다. 이 책에는 사람이 나오는 우리 옛 그림 85편이 소개된다. 이 가운데 70여 편이 사람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저자는 인물과 더불어 어떤 소재를 다루느냐에 따라 산수 인물화, 고사(故事) 인물화, 풍속 인물화, 신선이나 초월의 세계를 그린 도석(道釋) 인물화 등으로 나눈다. 제2부가 다룬 인물을 다룬 초상화가 이 책의 압권이다.
김홍도의 ‘부부 행상’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때나 지금이나 생계를 유지하면서 사는 일이 만만치 않다. 김홍도는 먼 길 고달프게 다리품 파는 부부 행상을 애잔한 마음으로 화폭에 옮겼다. 아내의 등에서는 아이가 새록새록 잠을 잔다. 저자는 그림의 풀이에다 “아내조차 치마 걷은 바짓부리에 행전을 찼으니 부부의 하염없는 고생길이 까마득하다”고 적었다. 우리는 사는 게 힘들다고들 하지만, 참 좋은 시대에 좋은 곳에서 나서 산다는 생각에 한참 그림에 시선이 머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좋은 그림이 말을 걸어온다. 좋은 글이나 그림은 또 하나의 대화다. 번잡한 시대에 재미나 친교를 찾아 바깥으로 쏘다닐 수도 있지만 이따금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어서 그림 속의 등장인물들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일도 멋진 일이 아니겠는가.
눈 내린 자취가 남아 있는 성벽 비탈길에 기생 두 명을 대동한 양반들이 무리를 이뤄 돗자리를 펼친 채 고기를 구워 먹고 있는 작가 미상의 ‘야연(野宴)’이란 그림도 눈길을 끈다. 19세기 한양 어느 모퉁이에서 벌어진 회식 장면이지만 당시가 어떤 시대인가. 일체의 도살이 금지된 시절이 아니던가. 제3부인 ‘든 자리와 난 자리’에는 그 시대나 이 시대나 사람 사는 곳은 꼭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남녀의 정분 이야기와 생활 이야기가 웃음을 자아낸다. 짬을 내서 옛 그림 전시회장을 찾는 기분으로 보기와 읽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