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 관직에 나올 정도라면 사리분별이 있으니, 누가 옳고 그르다는 것을 따지기보다 ‘ 누구는 우수하고 누구는 열등하다’고 따져야 한다.”
간신에겐 시비론(是非論)을 적용하더라도 붕당(朋黨)의 사대부의 경우 시비론보다 우열론(優劣論)에 입각해 인사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며 상대편을 사형장과 유배지로 내모는 극단적인 편 가르기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대신 각자의 장단점을 상대 평가해 적재적소에 기용하는 방식으로 대전환해 피비린내 나는 사화(士禍)와 환국(換局)의 사슬에서 벗어나자는 혁신적인 제안이다. 중국 고서에 남아있는 이상적인 제왕학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각색했다. 요즘 식으로 풀이하면 바람이나 ‘코드’보다 정책이나 인물로 인사를 하자는 것이다.
양다리 걸치기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탕평론은 숙종의 탕평전교(傳敎)로 첫걸음을 내디뎌 세도정치의 발호로 함몰될 때까지 인재 기용과 정국 안정에 큰 기여를 했다. 특히 70여 년에 달하는 영조 정조의 탕평시대로 이어져 조선 르네상스의 토대가 됐다. 영조는 남인과 서인의 지도자를 제외한 온건파를 기용한 소(小)탕평을 펼쳤고, 정조는 남인까지 아우르는 대(大)탕평을 실천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대탕평을 약속했다.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해 10월 광주전남 선대위 발족식에서 “저는 모든 공직에서 대탕평 인사를 하겠다. 박근혜 정부는 어느 한 지역이 아니라 모든 지역에 100% 대한민국 정권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선 일성도 “과거 반세기 동안 극한 분열과 갈등을 빚어온 역사의 고리를 화해와 대탕평책으로 끊겠다”는 다짐이었다.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행보는 대탕평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당장 진행 중인 인사청문회만 봐도 그렇다. 황찬현 감사원장 후보자, 김진태 검찰총장 후보자 등 3명의 후보자 중 2명이 경남 출신이다. 야당은 더 나아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중심으로 황 후보자, 김 후보자뿐만 아니라 양승태 대법원장, 정홍원 국무총리, 박한철 헌재소장, 홍경식 청와대 민정수석까지 PK(부산ㆍ경남) 인맥이 권력기관을 장악했다며 ‘경부선 인사’라고 비꼬고 있다. 또 다른 지역 편중인사인 셈이다.
인사 난맥에 대한 국민의 불만족도는 이미 임계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소중한 집권 1년의 전반기를 김용준 총리후보자 등의 연쇄 낙마와 인사지연 사태로 허송했는데도 지난 8월 청와대 개편 이후에도 인사 파동이 이어지고 있고 대탕평 약속은 아예 실종됐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의 잇따른 항명 사태는 인사 기용뿐만 아니라 고위직 인사 관리에도 큰 결함이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청와대로부터의 외압을 시사한 양건 전 감사원장이나 혼외자 논란에 휩싸였던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그렇다 쳐도 친박 최측근인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박 대통령에게, 군인인 장경욱 전 기무사령관이 김관진 국방장관에게, 검사인 윤석열 전 국정원사건 수사팀장이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에게 반기를 드는 모습은 볼썽사나웠다.
'30년대생, 80대 육박, 1960년대에 활동을 시작한 '이른바 '신386'의 약진 역시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100세 시대에 원로의 경륜과 지혜를 살린다는 장점도 있지만, 구세대 일색의 등용이 이어질 경우 자칫 복고풍으로 흘러 미래세대의 창의성과 의욕을 감퇴시킬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지역 편중인사를 적재적소에 따른 의도치 않은 결과라고 변명하고 있다. 진정한 탕평은 적재적소란 주장이 깔려 있다. 그러나 탕평과 적재적소는 박세채가 우열론에서 갈파했듯 상호 보완 관계다. 적재적소가 없는 탕평은 지역 안배와 나눠 먹기로 변질될 수 있고, 탕평이 전제되지 않는 적재적소는 편중인사와 자기 식구 감싸기로 빠져들기 십상이다. 지역이나 학교, 가문, 성별, 나이, 정치적 성향 등에 차별을 두지 않겠다는 무편무당(無偏無黨)의 당평책은 분열과 반목을 치유해 대통합을 이끌어내기 위한 정치적 결단이다. 박 대통령의 공약도 이런 고뇌에서 탄생했으리라 믿는다. 이제, 궁색한 변명보다 초심을 되새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