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ㆍ25 전쟁에 참가한 주한미군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1세대’인 A씨(57ㆍ여)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
한국에서만 살아온 A씨는 누구보다도 한국말이 유창하고 자신을 뼛속까지 한국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아르바이트 일용직도 구할 수 없다고 말했다. A씨는 “용역회사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해도 부담된다며 받아주지 않는다”면서 “폐지를 줍거나 빈 병을 모아 생계를 유지하는데 온종일 돌아다녀도 돈 만원 못 벌 때가 많다”고 말했다.
노동이주와 결혼이주의 역사가 20년을 훌쩍 넘겼지만 다문화가족은 삶은 여전히 팍팍한 실정이다. 사회적 취약계층인 다문화가족의 빈곤 문제가 심각하지만 그래도 본국보다 돈을 더 벌 수 있기에 버티고 있다.
한국은 서구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이주민을 받아들인 역사가 짧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3D 업종 기피현상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노동력을 수입해오기 시작했다. 1993년 제조업 분야에서 산업연수생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한국에서의 공식적인 외국 인력 도입이 본격화됐다. 또 농촌인구의 감소, 특히 여성인구의 감소로 외국인 신부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과연 ‘코리안 드림(Korean Dream)’을 안고 입국한 이들은 한국에서 꿈을 이루었을까.
지난 2월 여성가족부는 ‘2012년 전국 다문화가족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3년 전인 2009년과 비교해 결혼이주여성의 고용률이 증가하고 월 소득 200만원 미만 가구가 감소하는 등 빈곤이 완화됐다고 밝혔다.
다문화가족지원법 제4조에 따라 실시된 이번 실태조사는 전국의 다문화가족 1만5341가구를 대상으로 표본 조사한 결과다.
이번 조사 결과를 놓고 전문가들은 좀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또 더욱 심층적인 조사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실태조사 결과 먼저 월평균 가구소득 200만원 미만 가구 비율이 2009년 59.7%에서 2012년 41.9%로 17.8%p 줄었다.
전국 가구 중 월평균 가구소득이 200만원 미만인 가구 비율이 2009년 25.5%에서 2012년 17.7%로 지난 3년간 7.8p 감소한 것에 비해 다문화가구의 감소폭이 월등히 큰 것이 사실이다.
언뜻 보면 다문화가족의 살림살이가 나아진 것으로 보이지만 북미ㆍ호주ㆍ서유럽 등 고소득층이 많은 나라 출신의 다문화가족이 차지하는 비율이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실제 2009년 다문화가족실태조사에서는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1.8%에 불과했으나 2012년 실태조사에서는 4.5%로 그 비중이 2배 이상 증가한 것을 볼 수 있다.
월평균 가구소득을 살펴보면 200만~300만원 미만인 가구가 31.4%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100만~200만원 미만인 가구가 30.9%를 차지하는 등 다문화가족의 89.0%가 우리나라 전체 월평균 가구소득 404만원(통계청, 올해 2분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등 빈곤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또 2012년 결혼이주여성의 고용률은 53.0%로 2009년 36.9%에 비해 무려 16.1%p 크게 뛰었다. 2012년 전체 여성 고용률 48.4%에 비해서도 4.6%p 높은 수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반인에 비해 단순노무 종사자 및 서비스 종사자 비율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2012년 여성 결혼이민자 단순노무직 비율은 29.9%로 2009년 21.6%에 비해 8.3%p 증가했다. 일용직 비율 역시 2009년 14.8%에서 4.1%p 증가한 18.9%로 나타났다. 일반 여성 중 단순노무 종사자 비율은 16.3%, 일용직 비율은 7.0%이다. 결혼이주여성이나 귀화자의 고용률은 증가했으나 일자리의 질적 수준은 더욱 열악해졌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박천응 다문화비평가협회 공동대표(안산이주민센터 대표)는 “전국에 공무원으로 채용된 결혼이주여성이 30명 이상 되지만 정규직 공무원은 한 명도 없다”면서 “정부가 마련한 사회적 일자리들 역시 대부분이 임시 계약직이나 비정규직”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지난 3년간 우리나라 국민 중 빈곤층의 삶은 더욱 힘들고 어려워졌는데 결혼이주여성들의 생활만 나아졌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부의 이벤트성 땜질식 지원 혜택으로 일시적으로 삶이 나아진 것처럼 보일 수 있어도 자생력에 의해 경제적 상황이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박 대표의 주장이다.
아울러 한국인 배우자의 사망이나 이혼ㆍ별거는 결혼이민자가 빈곤 등 사회적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을 증대시키므로 자녀양육비 지원 등 위기에 처한 다문화가족에 대한 정책적 관심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자녀가 있는 이혼ㆍ별거자는 본인이 자녀를 양육하는 비율이 75.6%에 달하나 이들 중 배우자로부터 자녀양육비를 받는 경우는 9.5%에 불과한 실정이다.
김준식 아시안프렌즈 이사장은 “다문화가족이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 사회에 적응하고 있고 과거에 비해 인식 개선이 이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렵고 취약하다”면서 “불쌍한 사람을 돕는다는 시혜성 접근 방법보다는 그들의 역량을 강화하고 한국인과 네트워크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돕는 다원화된 다문화 정책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