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論]누군가의 삶- 정흥모 이야기너머 대표

입력 2013-09-23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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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60cm의 단신이지만 힘은 장사였다. 팔씨름은 누구에게도 져본 일이 없었고 허벅지 다리둘레가 60cm를 넘었다. 80kg 쌀가마를 혼자 어깨에 둘러메고 4층 계단을 쉬지 않고 올라 다녔다. 그랬던 사람이 한동안 무력하게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 있다. 마비된 다리는 뼈와 가죽만 남았다. 그러다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근육과 운동신경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게 되었다. 누운 상태에서라도 최선을 다해야 했다. 하지만 누워서 할 수 있는 최선은 누군가에게 매달리는 것이 전부였다.”

폭염이 유난했던 올 여름 내내 나는 장애인들과 함께 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장애인 부모들이 절반, 중도장애인들로 나머지 절반을 채운 글쓰기 모임에서였다. 응어리진 가슴을 부여잡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자기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일정은 길었다. 3, 4, 5, 6월은 매주 1회씩 하는 기초강좌를 시작했다. 살아온 삶을 먼저 말로 풀어내는 시간, 글쓰기에 대한 요령이랄까, 문장쓰기의 기초를 익히는 강좌가 약간 곁들여졌다.

사람들은 첫 시간부터 울었다. 누군가 입을 떼기만 하면 장내는 순식간에 울음으로 바다를 이뤘다. 가슴에 꽁꽁 묻어두고 살아온 이야기들, 누군가를 향해 난생 처음 입 밖으로 꺼내 놓는 행위, 그것은 곧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렇게 3개월을 보내고, 폭염으로 지쳐가던 7, 8월, 2개월 동안 꼬박 자기 생애에 대해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염려가 없었던 건 아니다. 응어리진 삶을 대면하는 하는 일, 과연 제대로 털어 놓을 수 있을까. 학교 다닐 때 말고는 일기 한 번 써본 적 없고, 문장 한 줄 제대로 완성한 적 없다. 쓸 수 있다고, 충분히 가능하다고 독려했지만, 걱정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런데, 참 신기했다. 한 주를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나와서 글들을 적어 나갔다. 어떤 분은 컴퓨터가 익숙지 않아 노트에 적어나갔고, 어떤 분은 노트에 적고, 카톡으로 옮겨 쓰기도 했다. 끈덕지게 남긴 글들이 매주 한 번씩 내게 날아들었다.

문장은 완성도가 떨어졌다. 비문이 많았고,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한 문장에 한 생각만 쓰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하는 얘기는 콧등으로 들었는지. 글을 타자로 옮기고 다듬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슬슬 짜증이 올라올 무렵, 어느새 홀로 눈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었다. 200 킬로그램이 넘는 산업용 엘리베이터에 깔려 하반신이 마비되고, 자녀를 가질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아들이면서 몸부림쳤지만 결국 아들 딸 잘 낳아서 대학까지 보낸 아버지의 담담한 소회, 지적장애아를 낳고, 운영하던 사업체마저 부도가 나서 빚더미에 올라앉았으나 아이 앞에서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던 아버지. 술이라고는 입에도 대지도 못했던 그가 드디어 첫 은행 빚을 갚던 날, 맥주 두 캔으로 자축하던 장면에 이르러서는 묘한 경외감마저 느껴졌다. 엄마들의 얘기는 미처 다 나오지 못했다. 첫 애를 낳고 차마 집안 어른들께 데려가지 못하겠다고 버틴 남편 말에 상처 입고 그 한에 짓눌려 살아온 소회를 남몰래 털어놓았던 어머니의 깊은 상처는 끝내 문장에 담기지 못했다. 막상 아이 얘기를 쓰려니까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던 어머니의 글도 결국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통해 마무리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연륜의 힘 때문이었을까. 이들의 글속에는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놀라운 힘이 내재돼 있었다. 장애라는 비극을 경험하며 몸부림쳐야 했던 사람들의 삶은 고단하지만 매우 경건했다. 비장애인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따뜻한 감성이 면면히 차고 흘렀다.

단언컨대, 문장을 조금 펴고 다듬었을 뿐, 단 한 줄, 단 한 개의 단어도 내 생각대로 바꾼 바 없다. 힘든 줄 알면서도, 다시 쓰도록 줄기차게 요구했고, 그들 또한 집요하게 호응했다. 모래를 씹어 진주를 잉태하듯 서걱거리는 아픔을 견딘 끝에 나온 글, 컴퓨터를 켜고 이 글들을 꺼낼 때마다 나는 마치 예배당에 들어서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누군가의 내밀한 삶을 들여다보는 일, 아픈 사람들이 흘린 눈물에 동참하는 행위, 그것이 마치 예배의식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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