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챔피언, 올림픽 금메달, 세계신기록 작성 등 스포츠 선수들이 현역으로 누릴 수 있는 영광의 순간은 다양하다. 하지만 영광의 순간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기록은 영원하지만 선수는 사라진다.
과거 30세라는 나이는 노장의 대명사였다. 현대 의학이 발달하고 체계적인 몸 관리가 가능해 선수 생명이 과거보다 길어졌다. 하지만 영원한 청춘은 없다. 아무리 최고 선수로 이름을 날려도 은퇴 후의 인생 2막의 삶까지 보장되진 않는다. 은퇴 이후의 삶이 현역 시절의 명성과 비례하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1980년대 중량급 복싱의 간판스타 박종팔은 최근 방송을 통해 선수 시절 번 수십억원의 돈을 탕진한 사연을 공개했다. “경기당 약 1억5000만원의 대전료를 받았다. 당시 서울 강남구 은마아파트가 2000만원 정도로 은퇴할 당시 집과 땅이 31곳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은퇴 후 손을 댄 스포츠센터와 술집 사업 등이 지인들의 배신으로 부도가 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고 결국 전 재산을 탕진했다고 고백했다.
선수 마감후 박종팔처럼 인생2막에 먹구름이 드리운 경우가 허다하다. 스포츠에 올인해 인생 2막에 대해 철저한 준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사회화 교육부족 등 다양한 이유가 존재한다.
또한 선수시절의 화려한 명성에 사로잡혀 인생 2막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도 한 원인이다. 국내 외 많은 스포츠 심리학자들은 이를 ‘워비곤 호수 효과(Lake Wobegon Effenct)’와 연관지어 설명하곤 한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톰 길로비치 교수가 사용한 이 단어는 소설가 게리슨 케일러의 작품 속 워비곤 호숫가에 기인한다. 이 가상 마을의 남자는 모두 잘 생겼고 여자는 강하며 아이들은 천재라는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선수 시절 최고의 위치에 있었던 만큼 은퇴 후에도 무슨 일이든 잘 할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은 사업 실패, 파산 등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이는 단지 국내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때문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이미 지난 2008년 ‘IOC 올림픽 선수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IOC Athlete Carrier Programme)’을 운영하고 있다. 엘리트 선수들이 은퇴할 무렵 무리 없이 직업전선에 투입될 수 있도록 국제적으로도 노력하고 있는 셈이다. 2008 베이징올림픽을 기점으로 시작돼 2012 런던올림픽 이후로도 계속해서 정기적인 프로그램을 시행·발전시켜가고 있다.
IOC가 실행중인 프로그램과는 조금 다르지만 최근 국내에서도 엘리트 선수들의 은퇴 이후 삶을 돕기 위한 정책이 발표됐다. 그에 따라 국민체육진흥법 시행규칙을 개정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종목별 국제연맹 및 아시아연맹 등이 주최하는 국제대회 중 어느 하나의 대회라도 참가한 국가대표 선수들은 구술시험만으로도 2급 경기지도자 및 3급 생활체육지도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 종전 제도에서는 지원자 모두가 구술시험은 물론 160시간의 연수 및 필기시험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선수 경력을 인정함으로써 이들의 사회 진출을 용이하게 했다. 문체부 역시 “새로운 제도의 시행이 은퇴 선수의 일자리 창출과 재능 나눔 실현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선수 출신으로 그나마 은퇴 후 가장 안정적인 선택은 동일한 분야에 도전하는 것이다. 프로배구 러시앤캐시 베스피드의 지원팀 장영기 과장은 지난 시즌까지 현대캐피탈에서 현역으로 뛰었다. 은퇴한 선수들은 대부분 코치의 길로 접어들지만 장 과장은 이와 달리 구단 업무를 택했다. 결코 흔치 않은 선택이었다. “코치 제의도 받았지만 선수 생활을 하면서 구단으로 받았던 것을 이제는 후배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며 프런트직을 택한 배경을 밝혔다.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훈련과 경기에만 전념했던 선수 때가 더 편했던 것 같다”며 어려움을 토로했지만 “신생팀에서 내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 간다는 느낌이 좋다”는 뿌듯함을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25년 이상 배구만 했던 탓에 사무실 업무가 쉽진 않다. 그는“임철균 사무국장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새로운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며 고마움을 나타냈다.
은퇴 후 전혀 다른 길을 걷는 경우도 있다. 전 복싱 세계챔피언 유명우는 현재 수원에서 오리 고깃집을 운영하는 어엿한 사장님이다. 유명우는 사업 성공의 비결에 대해 “챔피언이었던 것을 완전히 잊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스타 의식을 버리고 식당 주인이라는 생각만 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은퇴 후 현역 시절과는 다른 길을 택하는 선수들에게 유명우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진1)전 세계챔피언에서 이제는 성공한 식당 사장으로 변신한 유명우(사진=뉴시스)
사진2)은퇴 후 코치가 아닌 구단직원으로 변신한 전 러시앤케시 장영기 과장(사진=스포츠 포커스 김경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