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돈의 세계는 냉정했다. 후일 대장상을 7번이나 역임하는 다카하시 부총재는 런던의 대형 은행을 방문해 협조를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푸대접이었다. 유대계 로스차일드가의 거절은 특히 아팠다. 더 시티의 맹주이며 전쟁 채권의 귀재로 손꼽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런던 금융가는 일본의 필패를 예상하고 있었다.
요충지 뤄순에서 악전고투를 거듭하는 등 개전 초 전황도 좋지 않았다. 뤄순항이 굽어 보이는 203고지는 일본군에게 생지옥이었다. 맥심 기관총이 불을 뿜고 있는데도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제3군 사령관이 돌격을 계속 외쳤기 때문이었다. 사무라이 정신이 남아있던 그는 신병기 앞에서 돌격은 곧 몰살이란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맥심 기관총은 분당 6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최초의 완전 자동 기관총이었다. 그는 휘하 병력 13만 명 중 5만9000명을 잃었다. 장교였던 두 아들도 ‘닥치고 돌격’의 희생자가 됐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후일 할복한다. 부인도 자살한다. 엔으로는 맥심 같은 괜찮은 전쟁물자를 사오기 어려웠다. 그만큼 외화가 더욱 간절해졌다.
구세주는 엉뚱한 곳에서 나타났다. 미국 월가의 유대계 대부로 부상하고 있던 제이콥 쉬프였다. 런던에서 다카하시 부총재를 만난 그는 곧바로 '쩐의 동맹'을 맺었다. 무모한 베팅을 결정한 데에는 복수심이나 민족애 같은 비경제적 요소도 작용했다. 그는 동족인 유대인을 무섭게 박해한 차르를 원수로 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돈을 꾸러 온 일본은 그에게 친구나 다름없었다. 런던의 금융 거물에 비하면 왜소한 그였지만 열성만은 압도적이었다. 발 벗고 나서 월스트리트의 거물 모건과 록펠러재단까지 끌어들였다.
이즈음 한반도. 청과 함께 국외중립을 선언했지만 백성은 포연을 피할 수 없었고, 무능한 대한제국은 세계적인 비웃음거리가 됐다. 미국 신문 이그재미너의 종군기자로 조선을 방문한 '강철 군화' 의 저자 잭 런던은 이렇게 개탄했다. “외국 군대가 자기 나라를 통과해 가려고 하자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도망갔다…도시와 마을은 텅 비어 있었고, 논과 들은 버려져 있었다.” 일본군에 종군한 그의 편파성이나 제한된 취재 범위 등을 감안해도 대한제국은 제국주의의 먹이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모습이었다.
반면 '쩐의 동맹'은 착착 맞아 들어갔다. 무기를 보강한 일본군은 뤄순을 힘겹게 점령한 뒤 펑톈(奉天) 회전과 대한해협 해전 등에서 연달아 쾌승을 거뒀다. 러시아 차르는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전국이 혁명 분위기에 휩싸이면서 전의를 상실했다. 이 덕에 일본 정부는 1905년 3월 일본 담배 전매 수입을 담보로 발행한 세 번째 해외국채를 쉽게 팔 수 있었다. 외국인 최초로 일왕으로부터 직접 훈장을 받은 쉬프는 세계적인 금융 거물로 급성장했다.
최근 미·중 양강체제(G2)가 새롭게 진열을 정비했다. 버락 오마바 대통령이 연임하고, 시진핑 부주석이 최고지도자로 등장한 것이다. 2012년 현재가 100여년 전 당시와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의 러일이 동북아의 지배권을 놓고 사투를 벌였듯 G2 역시 주도권을 쉽게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동북아가 1세기 동안 세계의 변방에서 요석으로 발전한 터라 G2의 각축전은 더 집요하고 잔인할 수도 있다.
러일전쟁을 중재한 공로 등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1월 국무장관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조선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조선인들이 자신을 위해서도 스스로 하지 못한 일을, 자기 나라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을 위해 해주겠다고 나설 국가가 있겠는가."
18대 대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주요 세 후보의 외교 안보 비전이 선명하지 않다. 한미 동맹 발전, 중국과의 관계 강화, 남북 관계 개선 등 원론적인 수준의 언급만 했을 뿐, 구체적인 비전과 대응책을 내놓지 않았다. 유권자는 어느 후보가 G2 시대의 격랑을 슬기롭게 헤쳐갈 지도자인지 알 권리가 있다. 불의에도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하는’ 참극이 더 이상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