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명절, 아내는 발에 1~2도의 화상을 입었다. 즉시 병원에서 응급초치를 했지만 발이 부풀어 올라왔고, 많은 통증을 호소했다. 그 후, 10여 차례 다녔지만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세상의 일이란 늘 인과응보의 법칙이 작용하는데, 이 사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종손의 며느리이기에 늘 명절 전에 많은 준비를 해야 했고, 이 날도 15키로그램 쯤 되는 대형 국솥에 탕국을 끊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바닥으로 내려 놓으려는 순간 중심을 잃고 국솥이 넘어지면서 발위에 쏟아졌다. 하지만 그 때, 고1 아들은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왜, 아들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냐고 추궁을 하자, 아들이 자신보다 힘이 약하다는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한다.
그 후, 10일이 지나서 아내에게 우리 가족이 물건을 드는 한계를 정해주었고, 지키겠노라 약속을 받았다. 남편의 한계 무게는 20키로, 아내는 10키로, 고1 아들은 40키로, 대학생 딸은 15키로, 81세인 아버지는 5키로그램이다. 옛말에 여든 먹은 노모가 60살 아들에게 길조심하라고 하듯이, 부모란 늘 자식이 영원히 어리다고 생각을 하며 그것은 자칫, 넘치는 사랑으로 연결된다.
49의 법칙이란 4살이 되면서 아빠가 아이와 놀아주지 않기 시작하며, 아이가 9살이 되면 오히려 아이가 아빠와 놀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회현상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4살이면 너무 귀엽고, 예쁜 나이인데 왜 아빠가 도망을 가는 것일까? 이것은 사회의 변화, 특히 가정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대비하지 못한 결과이다.
어릴 때는 무조건 아빠가 아이를 좋아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말은 맞다. 3살까지는 잘 놀아주는 편이다. 그러나 문제는 4살이다. 3살과 4살은 신체적, 언어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 우선 몸무게가 훨씬 증가한다. 그래서 3살 때는 쉽게 안거나, 들거나, 업어줄 수 있지만 4살이 되면 아이가 원하는 만큼 해주지 못한다.
또한 3살의 아이는 말도 잘하지 못하고, 또한 표현력도 부족하다. 하지만 4살이 되면 정확한 언어의 표현이 가능하며, 이는 주로 떼를 쓰는데도 한 몫을 한다.
그래서 결국 아이와 쉽게 놀아주려는 아빠의 입장과 아빠와 하루종일 놀고 싶어하는 아이는 충돌과 갈등이 시작된다. 그 결과 아빠의 입장에서는 3살까지는 아이와 잘 놀아주지만, 4살이 되면서 몸무게도 늘고, 떼쟁이로 변한 아이에게 관심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그리고 그동안 아이가 항상 1순위였지만 이제 2순위, 3순위로 점점 밀리게 되며 아이와 놀아주는 시간의 양과 질은 점점 줄어들고 아이와 멀어진다.
9살이 되면 아이가 아빠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 시기를 인식하지 못하고, 4,5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눈치를 챈다. 그럼 왜 아이들이 그렇게 일찍 부모의 품을 떠나는 것일까?
그 단초는 아빠가 제공했다. 놀아주지 않는 아빠에게 더 이상 떼가 통하지 않게 된다. 또한 아빠와 마주칠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 그런데 아이에게는 빅뉴스가 있다. 컴퓨터의 발견이다. 아이는 점점 컴퓨터의 사용시간이 증가한다. 이 부분에 대하여 엄마들의 비자발적인 권유도 한 몫을 한다. 아이가 커지면서 남편이 아이와 놀아주지 않기에 그 몫은 고스란히 아내에게 양도된다. 또한 유아를 공부시키기에도 너무 많은 노력과 현금이 필요하다.
그런데 엄마에게 희소식이 생긴다. 컴퓨터를 잘하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주위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아이에게 간단한 학습프로그램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금방 나타난다. 아이는 이내 컴퓨터 게임에 빠져들고 만다. 그도 그럴 것이 컴퓨터는 아빠와 다르다.
아빠는 몇 번을 놀아달라고 애걸을 해도 놀아줄까, 말까 고민하지만 컴퓨터는 전혀 피곤하다거나 또는 놀기 싫다고 등을 돌리지 않는다. 놀아도, 또 놀아도 항상 반기는 컴퓨터에 이젠 자신의 아바타가 되어버리고 더 이상 아빠를 찾지 않게 된다. 심지어 자신의 영혼을 컴퓨터에 팔아버리는 아이, 즉 중독 아이들도 속속 증가하고 있다. 결국 컴퓨터는 아빠의 대체재가 되어 버렸다.
한 번, 아빠의 품을 떠난 아이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 심지어 컴퓨터를 좋아하는 4학년 아이에게 아빠가 일요일 아침, “아들아, 오늘 저녁에 너를 위해서 꽃등심을 준비했다. 함께 가자”라고 제안을 해도 반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마음을 숨기고 해밝은 표정으로 “아빠, 저 오늘 친구와 숙제해야 되요”라고 정중하게 거절한다.“ 그러나 그 로고스를 해석하면 음흉함이 들어있다. ‘아빠, 저는 아빠에게 관심 없어요.
그리고 아빠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사줘도 가기 싫어요. 저는 오늘 친구와 컴퓨터를 열심히 해서 레벨 올려야 하거든요. 그리고 부탁인데 제발 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세요. 아빠 일이나 열심히 하세요. 그리고 그깟 꽃등심은 엄마를 조르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어요. 그러니 아빠는 열심히 일해서 돈이나 많이 벌어다 주세요’ 라는 뜻이다.
그리고 49의 법칙은 아내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준다. 바로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 아내는 양육과 교육의 전권을 가지고 전가의 보도처럼 가정을 장악한다. 한편, 남편은 그저 돈만 많이 벌어와야하는 기계로 변하고, 아이의 양육과 교육에서 아웃사이더로 전락한다. 이런 관계에서 ‘과연 누가 가장 힘이들까?’라고 자문을 해보자.
정답은 엄마가 가장 힘이 든다. 아이는 공부만 하면 되고, 엄마가 가라는 학원을 가면 된다. 남편은 그저 돈만 많이 벌어오면 된다. 그러나 엄마는 아이의 교육과 양육을 전담하게 되고, 또한 집안일도 해야 된다. 특히 문제는 맞벌이다. 이 경우, 아내의 가사분담율이 80%가 넘는다는 통계가 나왔다.
그러니 가사와 직장에서 힘든 아내는 집에서도 많은 수고를 하기에 결국 남편이 이쁘게 보일 리가 없다. 한 마디로 밉상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부부의 관계는 점점 냉기류가 흐르고, 가정은 대화가 없고 무거운 정막이 흐르기 쉽다.
결국 아이와 놀아주지 않는 아빠의 결과는 단지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부부의 문제, 그리고 가정의 불안과 위기를 야기한다. 굳이 아빠에 대해서 변명을 해주자면 놀아주지 않는 아버지에게 배운 그 경험이 아이에게 경험의 법칙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고, 기업들도 생존하기 위하여 속도전쟁을 하듯이, 가정 역시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옛날에는 놀아주지 않는 아빠라고 할지라고 가정에서 권위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아빠는 그야말로 왕따의 대상이다. 이제는 아이와 잘 놀아주는 아빠가 곧 시대에 맞는 아이콘이며 또한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의 아빠이다. 또한 주위의 환경을 살펴보자. 골목길이 사라진 지금, 아이들이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공간이 이미 사라졌다.
그러므로 결국, 가정의 거실이 아이가 놀기에 가장 이상적인 공간이 되었다. 세상을 살면서 자꾸 남의 탓을 하면 내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먼저 나의 탓을 하면 내가 바뀌고, 가정이 바뀌고, 세상이 바뀐다.
아빠들이여!
이제 변화의 중심에 서라.
아이와의 놀이를 시작하고 즐겨라.
그러면 가장으로서 권위도 생기고 멋진 가장이 될 것이다.
-글:권오진/아빠학교 교장
-"놀이가 최고의 교육입니다" 키즈타임(www.kiztim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