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국회땐 '돌격대' 변신 = 여야 입법 전쟁에서 폭력국회가 펼쳐지면 보좌진들은 의원 대신 ‘방패막이’ ‘돌격대’로 변신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국회 본회의장과 상임위원회 회의장을 지키기 위해서, 이를 뚫고 회의장에 진입하기 위해선 보좌진‘동원령’이 내려진다. 이들은 의원들을 대신해 맨 앞에 나서서 상대편 의원들을 향해 폭언도 서슴지 않는다.
18대 국회에선 미디어법 처리를 놓고 여야가 동시에 본회의장 점거에 나서면서 주먹 싸움이 벌여졌다. 당시 점거 농성을 벌였던 민주당(옛 민주통합당) 의원실 보좌진들은 국회 본청에 갇힌 채 며칠을 보내야 했다. 몸싸움 과정에서 여당 의원의 목을 졸라 넘어뜨린 한 야당의원 보좌관이 있었는가 하면 전치 9주의 중상을 입은 보좌관도 있었다.
국정감사나 정치 현안을 놓고 경쟁 관계에 놓일 때도 있지만 하지만 대개 ‘모시는 의원’이 어느 당 소속이냐를 떠나 ‘동료 의식’이 생긴다고 입을 모은다. 요즘에는 당이 다른 의원실로 옮겨가는 보좌진도 적지 않다. 같은 상임위원회에서 활동할 경우 같은 당 의원실 보좌진보다 더 친한 경우도 많다.
◇국감땐 밤샘 자료준비 = 의원이 국감에서 이른바 ‘한 건’을 터뜨리려면 좋은 대본과 효과적인 연출이 있어야 한다. 그 역할을 보좌진이 맡는다. 국감을 앞두고 의원실 풍경은 전투 체제로 바뀐다. 숨겨뒀던 야전 간이침대가 속속 등장하고, 의원실마다 피감 기관 자료가 쌓인다.
국감 기간 의원회관의 불이 꺼지지 않는 이유도 질의 자료를 작성하기 위해 밤을 새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보좌진이 어떻게 구성돼 있느냐가 의원의 정책 능력을 가늠하게 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의원의 위상을 높이는 역할이 보좌진의 몫인 셈이다.
매년 국감 때가 되면 자료준비에 본연의 업무인 ‘24시간 의원 수행’까지 해야 하면서 보좌진들의 한숨 섞인 푸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이렇듯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만큼 보람을 느낄 기회가 많을 때도 국감기간이란 말이 나온다.
이들은 의원들을 위한 과잉충청이라는 이름으로, 몸통이 아닌 깃털 뒤집어 쓰기 의혹 등으로 정치적 책임을 떠맡기도 한다. 지난해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디도스 공격’ 당시 보좌진이 연루돼 물의를 빚기도 했다. 용의자로 최구식 한나라당(옛 새누리당) 의원의 9급 비서와 박희태 국회의장의 전 의전비서 등이 지목됐다. 수사는 이들에게 책임을 묻는 선에서 끝이 났다.
이 사건이 어느 정도 봉합돼 가던 중 보좌진들을 또다시 패닉에 빠졌다.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이 터지면서다. 고승덕 한나라당 의원이 지난 2008년 전당대회 당시 박희태 후보 측이 자신에게 돈 봉투를 전달했다고 밝힌 것이 발단이었다. 여기에 돈 봉투를 전달한 이와 고 의원 측이 돈 봉투를 되돌려준 인물이 박 후보의 당시 비서인 고모 씨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또 보좌진이냐”는 세간의 따가운 눈초리가 쏟아졌다. 고씨는 고 의원이 돌려준 돈을 자신의 선에서 다 썼다는 말 등으로 박 의장과의 연계성을 끊었다.
이처럼 때때로 터져나오는 일부 보좌진의 비리 의혹은 선량하고 정직한 대다수 보좌진의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 “제도적으로 감시·감독 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하루아침에 백수될 수도 = 국회의원 한 명이 채용할 수 있는 보좌진은 모두 6명이다. 4급 보좌관 2명, 5급 비서관과 6, 7, 9급 비서가 각 1명씩이다. 국회 전체를 놓고 보면 299명 의원 아래에 인턴을 제외한 1800여 명의 보좌진이 근무를 하는 셈이다. 이들은 모두 ‘별정직 공무원’으로 채용 권한은 전적으로 의원이 갖고 있다.
별정직 공무원이라는 이름에는 신분이 불안정하다는 속뜻도 포함된다. 총선을 앞두고 소속 국회의원의 재선 여부에 따라 ‘승진’을 할 수도 있고 ‘백수’가 될 수도 있다.
보좌진들은 내키지 않는 일을 할 때 흔히 “언제 잘릴지 모르는 비정규직의 비애”라는 푸념어린 말을 한다. 그러다 보니 의원의 말 한마디에 ‘직장’을 잃고 하루아침에 ‘백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 보좌진 신분이다. 실제 교체 시기가 짧아 ‘보좌관 훈련소’로 불리는 의원실은 늘 국회에 있다.
특히 정치 환경이 급속한 변화를 맞으면서 보좌진의 역할과 지위도 많이 달라졌다는 평이다. 의원과 한 배를 탔던 ‘정치적 동지’는 국회를 떠나고 있다. 빈자리는 국회에 입성한 ‘정책 전문가’가 채워나가는 중이다. 박사급 전문 인력이나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보좌관들이 하나 둘씩 늘고 있다.
의원과의 친분보다 공채를 통해 뽑힌 정책 보좌진이 주류를 형성하면서 이같은 ‘물갈이’ 현상은 더욱 빈번해졌다. 한 차례 국정 감사가 끝나고 나면 짐을 싸서 의원실을 떠나는 보좌진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신분상의 안정성이 떨어지다 보니 의원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벌이는 노력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부작용이 뒤따른다. ‘한 건 올리기’ 경쟁이 대표적이다. 9월 정기국회를 앞두고 ‘국정감사용’ 인사가 빈번히 이뤄지면서 기존 보좌관 자리가 위협받기도 한다. 교체된 보좌관 중 ‘능력부족’이 드러난 선거운동원 출신이 제법 있다는 게 국회 관계자의 전언이다. 또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면 실제 보좌진을 교체하는 의원들이 있기도 해 이들의 불안감이 더욱 커져만 간다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보좌관이 전문성을 바탕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고용안정 및 직업훈련 등 처우개선을 위한 각종 법적·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방모찌'서 '金배지'의 꿈 = 미국 의회의 보좌관은 전문성을 인정받아 ‘선출되지 않은 의원’이라고까지 불리지만, 우리 정치권에서는 오래전부터 정치판에서 커보겠다고 의원을 쫓아다니는 ‘가방모찌’ 이미지가 강했다. 의원이 필요로 하는 자료를 가방에 챙겨넣고 하루종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인물이라는 폄하의 의미가 담긴 말은 그래서 나왔다.
수행비서의 가장 큰 장점은 현장에서 정치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많은 정치지망생이 몰려드는 것도 고달프지만 정치판으로 가는 발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보좌진 출신 국회의원이 배출되면서 보좌진 경험을 정치적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최근들어 이조차도 여의치 않아졌다.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개혁공천을 통해 나눠먹기식 계파정치의 폐해를 없애자는 취지로 각 정당이 도입한 ‘상향식 공천’이 늘어서다. 상향식 공천을 하면 당직자들이 지역구 공천을 받을 가능성이 그만큼 떨어지게 된다.
지난 2004년 총선을 앞두고 공천을 신청한 한나라당 보좌진 전원이 공천에서 탈락한 사례는 보좌진과 의원 사이의 벽을 실감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