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스포츠가 점차 바뀌고 있다. 이전 같으면 꿈같은 이야기다. 수업은 뒷전이었고 오로지 운동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런 학교 스포츠가 변화를 맞고 있는 것이다. 운동선수들은 수업시간이 있으나마나 한 실정이었다. 선수들은 어느 종목을 막론하고 하루 종일 운동에만 매달리느라 수업시간에는 그저 맨 뒷자리에 앉아 졸거나 딴전을 피우기 일쑤였다.
그런데 요즘 초·중·고생들은 수업을 잘 챙긴다. 주말에 경기를 갖는다. 연습은 수업을 마친 뒤 한다.
사실 학교 교육의 목적은 학생이 정상적인 수업을 받아 전인 교육이 이루어지는데 있다. 배움속에서 커가야 올바른 성인으로 성장한다. 학생은 학습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갖는다.
그런데 학교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 학생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입장에서 안타까울 때가 적지 않다.
우리가 갖고 있는 독특한 학교 스포츠문화 탓이다. 학교가 갖는 교육목적과 조금 동떨어져 있다.
운동선수들은 학습권이 보장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기를 해야 하기때문이다. 각종 대회에 출전하려면 그에 맞는 일정한 훈련도 해야 한다. 이는 선수들이 정규수업을 받을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얘기다.
선수들은 수업을 전혀 받지 못하거나 오전 수업만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정종목의 선수들은 1년 내내 학교에 가지 않고 운동에만 몰두하기도 한다.
대회 출전과 훈련으로 인해 빠진 수업을 보충하기가 쉽지가 않다. 이는 선수, 학교, 감독, 부모 등이 묵시적으로 인정하면서 결국 보충수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업이나 학습보다 대회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에 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결국 학교는 선수들에게 전인교육을 유보한 채. 이런 악순환은 어느 선수들을 막론하고 동일하다는 것이다.
학습권을 보장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스포츠 문화가 달라져야 한다. 그동안 학교 스포츠는 엘리트 선수들의 육성에만 ‘올인’했다. 학생의 수업은 아예 관심이 없었고, 대회 성적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다.
오는 7월 런던올림픽이 열린다.
영국은 축구로 잘 알려져 있지만 모든 스포츠를 즐긴다. 영국에서 스포츠는 상류계급의 놀이문화였다. 상류층 자녀의 교육기관인 이튼칼리지 등 퍼블릭스쿨에서는 스포츠가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다. 스포츠를 통해 지도자 계급에 알맞은 체력을 길렀다. 또한 스포츠를 통해 룰과 페어 플레이 정신 등을 터득토록 했다. 사학 명문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학에서도 강의는 오전중에 끝내고 오후에는 모든 학생이 스포츠에 전념했다.
에릭 시걸의 작품 ‘러브스토리’에 나오는 주인공 올리버는 법대생이지만 아이스하키 선수로도 활동한다. 선수들은 운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공을 먼저하고 스포츠를 즐기는 형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일정 수준의 학업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대회출전을 금지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학업성적하고 운동선수는 무관하다. 거꾸로 대회 성적만 좋으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
따라서 우리도 이제 클럽문화로 전화해야 한다. 학교가 나서서 운동을 집중교육할 일이 아니다.
미국과 호주를 비롯해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스포츠클럽이 활성화돼 있다. 체육시설의 경우 농촌지역의 경우에도 조그마한 마을에 다목적 체육관이 있다. 이러한 시설은 행정구역별로 설치돼 스포츠클럽들이 구성된다. 각종 지역리그를 실시, 스포츠클럽 간 경쟁을 통해 우수선수를 발굴한다. 이들은 지도자 양성과 엘리트 선수로 육성된다. 이러한 제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경제, 사회적 수준이 유럽과 한국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사회적인 이슈로 복지가 대두되는 시점에서 스포츠 활동이 단순히 학교나 개개인이 책임져야 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복지의 일환에 포함돼야 한다. 스포츠 활동이 대중적 인식으로 자리 잡고 정부가 시설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프로그램 지원을 해야 스포츠가 발전한다. 스포츠도 복지정책의 하나라는 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