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당장 봐야겠네요.”
급 수긍의 달인인 난 바로 컴퓨터를 켜 표 두 장을 예매했다. 한 장은 나, 그리고 또 한 장은 서로의 곁을 지켰던 청춘 시절의 내 친구.
시작부터 올리비아 핫세 뺨치는 콧날의 한가인, 그리고 그녀의 청담동 사모님 룩이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런 얼굴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란 생각과 함께 서서히 스크린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야기는 바닐라 향 쉬폰 케이크만큼이나 부드럽게 흘러갔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단 한 번도 곁눈질을 하지 못할 정도로 날 사로잡았다.
따끈한 커피 한 잔씩을 손으로 감싸 앉고 영화관 밖으로 나섰다. 차가워 보이는 하얀 달을 배경삼아 한껏 아련한 분위기를 깔며 친구에게 물었다.
“영화를 보며 내가 떠올린 그도, 날 떠올려줄까?”
친구가 “으음” 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글세, 근데 난 누구의 썅년이었을까?(영화를 본 사람은 안다^^;)”
순간, 서로를 마주보며 “푸하하” 터뜨린 웃음이 선선한 바람 속으로 파고들며, 애써 만든 분위기는 단박에 산산조각 났다. 우린 추위 따윈 잊은 채, 달빛 아래를 저벅거리며,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했다. ‘건축학 개론’에 등장한 추억의 키워드들을 하나하나 훑어가며.
*공부보단 연애의 장이었던 독서실-“독서실만 안 다녔어도 수능 점수 10점은 더 올라갔을 텐데.”
*한때 좀 논다는 언니 오빠들의 패션을 책임졌던 ‘게스’와 ‘저버’-“질질 끌리는 바지밑단으로 깨끗한 길거리 청소에 일조했지.”
*기다림의 미학을 처음 깨닫게 해 준 삐삐-“하루 종일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게 만들었지.”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CD플레이어-“공 CD상태에도, 있어 보이기 위해 늘 이어폰을 꼽고 다녔지.”
우리에게 설렘, 기쁨, 애틋함, 슬픔 등의 감정을 선물하고 떠난 첫사랑. 그에 대한 이야기보다, 그 때의 우리를 겹겹이 둘러싼 사소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주가 됐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첫사랑이 그립고, 아련한 건, 점점 희미해져가는 그때의 내 자신을, 우리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랬다. ‘건축한 개론’은 오래 된 쓰디쓴 커피 향이 나는 영화가 아니었다. 책장 한 구석에 꽂힌, 평범하고 식상해서 오히려 더 공감 가는, 나와 너의 이야기라 더욱 아련하고 애틋한, ‘오래된 사진첩’같은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영화.
추억에 흠뻑 젖은 채로 집에 들어왔다. 현관에 들어서는 동시에 내 마지막 사랑이 날 반겼다. 그의 청명한 웃음이 날 다시 현실로 불러들였다.
삐삐가 아닌 스마트 폰, 독서실이 아닌 작업실, CD플레이어가 아닌 아이팟.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이 또다시 추억이 된다 해도,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는 언제나 현실이 되길 바라며.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