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유치나 경영활동에 신경 써야 할 금융권 인사들이 유독 정치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본인 앞날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금융권 수장들은 정치권력 지형 변화를 고려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임을 포기하거나 갑자기 물러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또 정부 소유 금융사의 경우 지주사 회장이나 은행장의 임기가 많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선 이후 교체될 것이라는 관측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황영기 전 KB금융지주 회장 사태를 예로 들며 금융권 실세들이 ‘출구전략’을 세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돈다. 황 전 회장은 우리은행장 재직시절 파생상품 투자손실 문제를 이유로 금융감독원의 집중검사 끝에 2009년 결국 옷을 벗었다.
금융권 관계자는 “우리금융그룹만 하더라도 지난번 정권이 끝났을 때 박병원 회장(현 은행연합회 회장)과 박해춘 우리은행장의 일괄 사퇴를 받은 바 있다”며 “과거의 악순한이 되풀이 된다면 정권이 바뀐 후 옷을 벗는 고위직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금융권 일부 경영진 중에는 차기 대선에서 유력한 후보 쪽에 벌써부터 줄을 대고 있다는 소문까지 들린다. 물론 금융권 수장들이 정치에 관심 있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정치권 권력 변화에 따라 지배구조가 바뀌고 이에 따라 금융사 경쟁력을 저하시켜 금융권 발전까지 막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다.
한 시중은행 고위 임원은 “정치권의 변화에 따라 금융권 CEO가 교체되는 ‘CEO 리스크’는 우리나라 금융권의 가장 큰 고질병”이라고 토로한다.
전문가들 역시 금융은 절대로 정치바람을 타면 안 되는 곳이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 강정원 전 KB국민은행장은 선진연대 등 정치권에 줄을 대 연임을 하려 했지만 인사와 대출청탁으로 조직문화는 무너졌고 지난 2010년에는 883억원(지주기준)의 순이익을 내는 데 그쳤다.
정책도 시시때때로 변한다. 분명 중장기 과제로 세웠던 정책은 어느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정이 되고 있다. 우리금융 민영화 방안이 12년째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만 몇차례 바뀌었다. 현 정부 출범 초기엔 우리금융 민영화를 기반으로 한 ‘메가뱅크’론이 지난해엔 산업은행 민영화를 기반으로 한 ‘메가뱅크’론으로 바뀌었다. 한 금융지주 임원은 “정책의 뼈대가 없는 것 같다. 큰 틀에서 밑그림을 그리고 진행된다는 느낌보다는 임기응변식의 느낌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최근 KDB산업은행이 서두르고 있는 기업공개도 정치적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이미 야당에선 산업은행 등의 민영화를 원점부터 재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산업은행 관계자는 “현재 산업은행이 2014년까지 기업공개를 통해 1주의 주식이라도 매각하도록 되어 있지만 정권이 바뀌면 이 자체가 무산될 수 있다”면서 “기존에 세운 민영화 추진 계획대로 진행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말했다.
정치권과 금융권 간의 이같은 역학구도는 결국 한국 금융을 아직도 우물 안 개구리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최근 글로벌 전문지인 뱅커가 집계한 세계 은행 순위에서 총자산 기준으로 79위에 오른 우리금융지주가 으뜸이다. 세계 1000대 은행에 포함된 은행 수는 우리나라가 고작 9개다. 1000대 은행 안에 들어간 은행이 일본 103개, 중국 101개, 인도 32개 등으로 우리는 아시아권에서조차 여전히 명함을 못 내밀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권이 정치권 판도 변화에만 관심을 둔다면 더 이상 우리나라 금융의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다”면서 “이제라도 우리나라 금융의 미래를 위해서 금융권의 홀로서기가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