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한 여성 펀드매니저임에도 여자로, 엄마로, 아내로 살아가느라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다. 한 순간 셋 중 어느 하나라도 놓친다면 ‘여자가 집에서 살림이나 하지’라는 핀잔을 듣는다. 지난 2월 개봉한 헐리우드 영화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가 그려내는 미국 워킹맘의 모습이다. 슈퍼우먼이 돼야 하는 워킹맘의 현실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도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부부간 맞벌이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일하는 엄마 ‘워킹맘’은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돈이 들고 돈을 벌기 위해 일터로 나간다. 반면 가까이서 돌봐줄 수 없는 엄마는 늘 죄인이 된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워킹맘은 우울하다’는 말이 나온다.
아이들 학원 문제로 주변 학부모들과 의논을 하느라 어제 한 시간 일찍 퇴근한 탓에 업무가 많이 밀렸다. 밥 먹을 시간도 없다. 이씨는 최근 원형탈모가 심해졌고 이유 없이 짜증이 날 때도 많다. 가끔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고 우울해지기도 한다.
우리나라 워킹맘 10명 중 9명은 우울증을 경험한다. 자녀양육 컨설팅기관 듀오차일드가 전국 198명의 자녀를 키우는 직장여성을 상대로 조사한 ‘대한민국 워킹맘 스트레스’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88.9%(176명)가 ‘우울함을 느낀다’고 답했다.
일과 가정, 둘 다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원더우먼’ 워킹맘이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집과 직장을 넘나드는 사이 지쳐버리고 만다. 이른바‘멘탈붕괴’ 상태에 이르기 일쑤다.
공무원인 조모씨(34)의 얘길 들어보자.
“아침에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5시 30분에 일어난다. 남편, 아이와 식사를 마치고 출근길에 아이들을 8시 20분까지 유치원에 데려다주면 출근시간 9시를 맞추기 빠듯하다. 일을 하다 오후 3시쯤 할머니가 아이를 잘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는지 확인 전화를 하고, 6시 30분 퇴근해 할머니와 교대하고 나면 아이를 보면서 저녁 준비를 한다.”아이를 출근하면서 아이들을 8시 20분까지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후 3시에 할머니가 집으로 데려 오”며 “6시 반에 퇴근하자마자 할머니와 교대한다”고 말했다.
조씨는 “아이 맡기는 사람한테도 눈치 보이고 남편이 일을 핑계로 잘 도와주지 않거나 혼자 다 해야 할 때 화가 난다”면서 “무엇보다 칼퇴근을 하다 보니 직장에서도 눈치가 보인다. 특히 직장에서 왕따를 당할까봐 둘째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워킹맘 포기하고 싶지만… = 워킹맘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자녀교육 문제다. 듀오차일드 조사에서 워킹맘들은 ‘가장 힘든 역할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과반수 이상은 엄마로서의 역할(57.1%)이라고 답했다.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를 묻는 질문에는 자녀양육 시간부족이라는 응답이 44.9%(89명)로 가장 높았다.
경기도 덕소에 사는 김모씨(39)는 지난달 사교육비 지출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영어 학원, 보습학원, 예체능학원을 다니는 초등학교 자녀 두 명의 월 교육비가 120만원이 나왔다. 이러한 부담은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더 심해진다. 복잡한 입시 정보를 파악하고 자녀 교육에 좀 더 세심하게 신경 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것도 이 시기다.
김씨는 “집에서 공부를 가르칠 시간이 없어 자꾸 사교육에 의존하게 된다”며 “자녀교육에 신경 쓰려면 일을 그만둬야 하는데 그러면 사교육비 감당이 안된다. 사교육비를 충당하기 위해 직장을 다닐 수밖에 없는 역설적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미경 듀오차일드 총괄팀장은 “일하는 엄마로서의 죄책감에서 벗어나 더욱 중요한 자신의 성장, 행복한 부부관계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며 “직장과 가정에서 모두 완벽해야 한다는 지나친 강박이 워킹맘 스트레스를 키울 수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