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에 돈은 풀렸는데 흐르지가 않는다. 경기위축 우려로 기업들이 돈을 창고에 쌓아두기만 하고 투자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시중에 돈이 얼마나 빠르게 도는지 보여주는 척도인 통화유통속도는 2분기째 내리막을 걸었다. 올 3분기 통화유통속도는 0.720으로 전분기 0.727에 비해 0.007포인트 하락했다. 통화유통속도는 우리나라의 경기가 회복세를 보이면서 지난해부터 올 1분기까지 상승추세를 보였다. 장기추세로 보면 금융위기 이후 점진적인 상승세였다. 이 같은 추세는 올 2분기부터 꺾였다.
통화유통속도는 명목 국내총생산(GDP·계절조정)을 시중 통화량을 나타내는 광의통화(M2·계절조정)로 나눠서 산출한다. 경제주체들의 생산·투자·소비 활동이 활발하면 유통속도는 상승한다. 이 때문에 학계 일각에서는 통화유통속도 하락을 경기 침체의 신호탄으로 해석한다.
실제 기업들은 지난달 경기 둔화를 염려했다. 자금을 선확보하기 위해 회사채를 대규모로 발행했다. 11월 회사채 순발행은 2조9000억원으로 30개월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시중에 돈이 흐르지 않다보니 자금난을 겪지 않기 위해 선제적인 대응에 나섰다.
통화유통속도의 하락은 저금리 기조와도 맞물린다. 금리가 낮다보니 돈을 굴리지 않고 예금통장에 묵혀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금리가 낮으면 대출과 투자활동이 활발해지지만 경기 위축 우려로 이같은 공식이 깨졌다.
통화당국으로서는 고심이 깊어질 수 밖에 없다. 돈이 많이 풀려도 돌지 않으니 내놓을 카드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처럼 신용이 팽창하면 금융위기 재발 가능성도 있다. 최근 금융통화위원회는 경상수지 흑자규모 축소에도 시중통화량이 상승세를 보인 것에 대해 점검할 것을 지시했다.
최병선 동덕여대 경제학과 교수는“가계대출이 늘면서 민간신용은 증가했지만 이는 생산형이라기 보다는 생계형이기 때문에 보니 돈이 풀려도 생산까지 이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