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소재업체들이 최근 설탕과 밀가루값을 올렸지만, 여론을 의식해 가격인상을 늦췄던 식품업체 한 고위 임원은 또 다시 고개를 떨궜다. 지난 10일 정부가 최근 급등하고 있는 가공식품 물가 관리에 나서겠다며 업체별로 인상시기를 분산시키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정부는 특히 일부에서 인플레이션 기대심리에 따라 동반·편승 인상의 징후마저 있다고 압박하면서 담합 인상이나 불공정거래행위 발생 여부를 집중 점검하고 문제가 발견되면 공정거래위원회나 지방자치단체 등과 공동으로 현장조사까지 진행하겠다고 엄포까지 놓았다.
이 임원은 12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결국 공정위가 전면에 나서고 여론에 짓눌리는 양상이 다시 진행되고 있다”며 “식품회사는 MB정권에서 가장 손쉬운 물가통제 업종이라는 것이 다시 한 번 입증됐다”고 말했다.
수개월을 끌어온 기름값도 모든 정유사가 일괄적으로 휘발유값을 100원 내리며 정부에 백기를 들었다. 3개월 한시적 인하라고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연초 “기름값이 묘하다”는 말을 뱉은 후 석 달만에 가격인하를 실시한 것이다.
석유제품가격 TF팀이 가동되고, 공정위의 정유사 가격담합의혹 조사,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의 압박성 언급이 있던 직후라 정유사들의 100원 인하 ‘화답’이 어색하지도 않다는 반응이다. 통신비 인하 요구 숙제를 받아든 통신업체들도 유통과 정유사들과 함께 벙어리 냉가슴을 앓으면서도 정부에 대해서는 정면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기업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초기 부터 내세운 물가억제정책이 정부 관료들의 실적쌓기에 완전히 기업옥죄기로 바뀌었고, 특히 공정위를 앞세운 ‘무한 칼질’에 반기업적 정서가 역력하다고 하소연한다. 서슬 퍼런 직접물가통제가 가져올 다양한 부작용은 이미 뒷전이다.
정부가 뛰는 물가를 잡기 위해 선택한 기업 옥죄기가 관치로 변해가는 모습에 ‘이성을 잃었다’는 목소리가 정부 안팎에서도 터져나오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의 한 입법조사관은 “물가를 내리기 위한 정부의 고육지책이겠지만 시장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나중에 큰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며 “정부는 단시일 내에 효과를 보겠지만 동시에 다른 정책적 대안을 마련해야 시장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충고했다.
공정위를 앞세운 물가 잡기도 학계나 재계 등에서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시장개입 강도가 지나치면 공정위 본연의 업무에 소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가격규제가 공정위 본연의 역할로 착각하고 있는데 이는 오히려 공정위의 기능과 역할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조사권 발동에 대한 언질을 하면서 편법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건 시장을 살려야 할 공정위가 시장경제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고 비판했다.
표 교수의 지적은 지난 1월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이 “공정위가 물가관리 기관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직원은 색출해 인사조치하겠다”고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공정위는 가공식품회사에 대한 과징금 부과와 정유사와 통신사들이 담합 여부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고 있다.
정부의 물가억제정책이 무조건적인 기업 양보만을 강요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가격인상요인이 생겼지만 희생에 따른 보상이 충분치 않다는 게 기업들의 가장 큰 불만이다. 정유사들이 100원 인하로 정부와 소비자들에게 성의를 표시했으면 정부 차원에서 직접적인 지원은 아니더라도 국가 육성 사업에 대한 가시적 전망 정도는 보여줘야 한다는 지적이다.
임희정 현대경제연구원 동향분석팀장(박사)는 “정부의 물가억제정책에 기업들이 반응을 보이고는 있지만 전혀 혜택은 주지 않고 있다”며 “정유사들의 경우 신재생에너지 사업에 정부보조금을 지급하면 단기적으로는 기업이 손해를 보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인센티브 형식이 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