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성장, 3% 물가 목표’를 고수하던 정부가 성장을 뒤로 미루고, 물가에 올인하기 위해 거시경제 정책 수정을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치솟고 있는 국제유가가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리비아 사태의 장기화 가능성이 있는데다,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마저 정정 불안에 싸일 수도 있어 당분간 국제유가의 고공행진은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성장에 집착한 ‘고환율·저금리’ 정책도 한계를 드러냈고, 행정력을 동원한 이른바 ‘관치식 물가잡기 실패’도 경제궤도 수정의 배경이 됐다.
◇궤도수정 직격탄…국제유가 = 정부는 당초 올해 국제유가를 평균 85달러로 잡고 경제운용 방향을 결정했다.
그러나 9일 거래된 두바이유 현물 거래가격은 108.45달러를 기록하는 등 100달러를 훌쩍 넘었다. 2월에는 튀니지에서 시작한 중동 민주화 불길이 이집트·리비아·바레인 등으로 옮겨 붙으며 110달러를 넘어서기도 했다. 당시 윤증현 재정부 장관도 “상당히 좋지 않다. 물가를 둘러싼 국내외 환경이 대단히 비우호적”이라고 우려했다.
한국수입업협회에 따르면 수입 원자재 가격 동향을 보여주는 ‘코이마’(KOIMA)지수도 지난달 373.44를 기록해 2008년 8월(411.34)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2월 소비자물가지수가 전년동월대비 무려 4.5% 상승하며 2008년 11월(4.5%) 이후 27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고환율·저금리 정책 한계 드러나 = 정부가 물가를 잡는데 실패한 것은 성장에 집착한 고환율·저금리 기조를 유지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나라당을 비롯한 정치권은 물론 학계·시민단체 등 전 계층에서 한 목소리다. 정두언 한나라당 최고의원은 “이제 성장은 어느 정도 포기하더라도 물가에 주력하는 경제안정을 우선시하는 기조로 바뀌어야 한다”며 “저금리 고환율 정책도 조정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도 “고환율·저금리를 기초로 한 성장정책 기조를 바꿔야 한다”면서 “이념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역시 “현 정부에서 물가관리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고환율·저금리 정책에 있다”며 “고환율 정책으로 수출대기업은 사상 최대의 이익을 누리고 있는 반면, 수입물가도 함께 높아져 국내 물가상승을 부추겼다”고 진단했다.
◇관치식 물가잡기 실패도 원인 = 처음부터 논란을 일으켰던 정부의 기업 옥죄기식 물가잡기 실패가 결국 부메랑이 돼 거시경제 정책 수정 검토에까지 이르게 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배추파동 이후 물가가 전 방위적으로 오르자 정부는 공급 측면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 공급처인 기업들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국제유가 등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한 변수에 전혀 손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업 압박만으로는 물가를 잡는 것은 처음부터 힘들었다는 것.
오히려 최근에는 개인서비스요금(1월 2.6%·2월 3.0%)이 계속 오르는 등 수요측면 물가 압력이 강해지고 있는 형국이다. 기업 옥죄기식 물가잡기를 주도한 윤증현 재정부 장관도 “가중되는 인플레이션 압력이 위험요인으로 작용해 앞으로 경제운용이 매우 조심스럽다. 이번 물가 상승은 구조적으로 안정이 어렵다”며 한계를 인정했다.
경실련 관계자는 “이미 실패로 드러난 가격통제방식 등 단기처방에서 벗어나 근본적인 물가 안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성장일변도의 경제정책 기조를 포기하고, 재정건전성·가계부채 등 위험요인들을 하나씩 줄여나가며 물가를 관리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