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의 '대기업 책임론'에 대한 발언이 잇따르면서 대기업들의 곳간 열기가 어떻게 이뤄질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27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대기업들은 미소금융 같은 서민정책에 적극 동참해 사회적 책임을 다할 필요가 있다"며 "또한 일자리 창출과 투자, 중소기업과의 상생ㆍ협력 문제에서 대기업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도 같은 날 은행장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기업들이 은행보다 돈이 많다"며 "특히 삼성전자는 은행보다 더 싸게 돈을 빌려올 수 있다"며 대기업들의 현금 쌓아두기 관행을 지적했다.
청와대와 정부 고위 관계자의 '대기업'에 대한 압박이 거세지면서 대기업들은 정부에 미운털이 박히지 않기 위해 각종 방안을 마련 중이다.
삼성전자는 지난달부터 납품단가나 구매 관행 등에 관한 자체 조사를 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현대ㆍ기아차는 지난 27일 1·2차 부품 협력사 대표들과 함께 '현대차그룹 협력사 상생협력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실제 산업 현장에서 체감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양극화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 따르면 원자재 가격 상승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이 납품단가 현실화를 반영해주지 않아 가격을 올리지 못한 중소기업 비율이 44%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시장 논리상 기업들의 자율에 맡기는 것이 맞겠지만, 지금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서민경제 간의 산업 생태계가 깨진 상황"이라며 "일정 부분 정부의 개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결국 문제는 정부가 어떤 정책을 통해 국내 주요기업들이 보유한 현금을 시장에서 순환시킬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에 따르면 지난 1분기말 현재 국내 주요 대기업의 현금성 자산(현금성 자산+단기금융상품)보유 현황을 살펴보면 현대자동차가 6조6216억원으로 가장 많았으며, 포스코가 6조1826억원, 현대제철 1조8272억원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국내 주요 대기업인 삼성전자와 LG전자가 K-IFRS(기업회계기준) 조기적용 문제로 집계결과에서 빠진 점을 감안할 때 국내 주요 기업들의 현금성 자산은 70조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기업 관계자들은 "최근 이어지고 있는 정부 고위관료들의 대기업 비판으로 '反대기업 정서'가 강해질 것으로 우려된다"며 "정부에서 얼마나 탄탄한 친서민 정책을 내놓는가에 달린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갈등적 노선이 아닌, 대기업들에게는 과거와 달라진 경영환경을 이해하고, 중소기업에게는 자생력을 키워 나갈 수 있는 정책이 나와야 한다고 주문했다.
현대경제연구원 이원형 연구원은 "현재 대내외 경제상황은 미래를 예측하기 상당히 어렵다"며 "기업 입장에서는 보수적으로 경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따라서 대기업과 협력사와의 상생을 만들어간다 하더라도 이에 대한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점.
이 연구원은 "정부에서 친서민 정책을 내놓을 때,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점 등 과거와 달라진 대기업의 경영 환경을 고려하는 정책이 나와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산업연구원 이항구 연구원은 "정부는 현재 대기업들이 현금을 쌓아두고 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는데, 이런 현상은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글로벌 경제상황에서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기업들도 마찬가지 추세"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투자도 단순히 설비투자 규모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연구개발, 교육, 신수종사업 발굴 등 다양한 관점이 필요하다"며 "정부는 대기업들의 설비투자만 잣대로 삼지 말고 효율화 투자를 봐야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삼성경제연구소 이갑수 수석연구원은 대기업에 대한 비판과 요구에 앞서 중소기업들이 자생할 수 있는 방안이 나와야 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 연구원은 "국내 대기업과 협력사와의 관계는 외국과 비교했을 때 절대 불합리하지는 않다"며 "대신 중소기업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가지고 커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이 나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연구원은 "중소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는 원칙적으로는 기업 스스로가 해야한다"면서도 "수출마케팅이라든지, 교육, 해외시장 개척을 위한 정보제공 등 정부에서 지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