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정권시절 민주화의 상징으로 숱한 고초를 겪은 그는 대통령에 도전해 네번째만인 지난 1997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돼 헌정사상 첫 여야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격동의 'IMF 외환위기'란 격랑을 헤쳐 나가고 분단 이후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이란 열매를 맺는 등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김 전 대통령은 목포 앞바다 섬인 하의도에서 소작농 아들로 태어났다. 목포로 유학해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에 수석 합격한 후 해운회사 경영과 목포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며 사업가로서의 수완도 발휘했다.
해방 이후 좌우익이 첨예한 대립을 벌이던 남한 공간에서 중도 좌파이자 민족주의자인 몽양 여운형과 안재홍의 주도로 구축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하지만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탈퇴했다.
목포일보 사장을 역임한 그는 한국전쟁 휴전 이후 정치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게 된다. 그는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된 후 첫 대통령에 출마한 1971년까지 6,7,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그는 총 6선의 국회의원을 지냈다.
정치 입문이후 일정은 순탄치 않았다. 1954년 실시된 제3대 민의원 선거 때 목포에서 출마해 낙선했고 1960면 5대 민의원 선거까지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4.19혁명 이후 치뤄진 1960년 인제 보선에서 당선해 드디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첫 부인 차용애씨와 사별하고 선거 낙선에 따라 생활고를 겪던 중 1962년 YWCA 연합회 총무로 활동하던 이희호 여사와 재혼하고 1963년 6대 총선 때 목포로 지역구를 옮겨 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1997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모두 네차례 대선에 도전했다. 첫번째가 3선에 도전한 박정희 대통령과 한판 승부를 벌였던 1971년 대통령 선거였다.
그는 1970년 김영삼(YS), 이철승 후보와 경합을 벌인 끝에 막판 이철승 후보의 지지에 따라 야당인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당선됐다. 다음해 대선에서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95만표차로 석패했다.
그는 당시 대선후보 시절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연설에서 "이번에 또다시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되면 다시는 대통령 선거가 없는 총통시대가 올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었다.
결국 그의 말대로 박 전 대통령은 1972년 영구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이란 무리수를 쓰고 말았다.
이후 박 전대통령과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는 그에 대한 본격적인 정치 탄압을 가했다. 1973년 김 전 대통령은 중정요원들에 의해 일본에서 납치돼 현해탄에 수장될 뻔한 절대절명의 순간에서 납치 5일만에 미국 CIA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기도 했다.
이후에도 1987년 6.29선언이 있기 전까지 민주화의 상징인 그의 생애는 강압적인 군정 치하에서 납치와 망명, 투옥, 연금 등으로 점철됐다.
1976~1978년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79년 10.26 사태로 박 전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복권돼 정치활동을 재개했으나 이른 바 '하나회'로 일컬어지는 전두환 신군부가 이끄는 12.12 사태와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과정에서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국제사회의 탄원으로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돼 미국 망명길에 올라 1985년 귀국했으나 김영삼 전 대통령과 더불어 가택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
두 사람은 민주협 공동의장으로 배후에서 1987년 총선 당시 대통령 간선제를 폐지하고 직선제를 제시해 야당인 신민당 선풍을 주도했다.
그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불거진 민주화의 열기속에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를 내걸고 대통령 직선제를 갈구하던 6월 항쟁끝에 결국 노태우 민정당 대선 후보자는 6.29선언을 통해 민의를 결국 수용했다.
김 전 대통령도 결국 사면에 따라 1987년 8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했다.
하지만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YS와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평민당을 창당해 출마했지만 단일화에 실패한 YS와 그는 대선에서 2위와 3위의 득표를 기록, 군사 정권의 후계자인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세번째 출마했지만 1990년 집권당인 민정당과 김종필(JP)씨와 연대해 탄생된 민자당 후보로 나선 평생의 라이벌 YS에게 또다시 고배를 들어야 했다.
그는 결국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1993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1년 동안 연구활동을 하고 1994년 귀국,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해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에도 당시 동교동계의 막후인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1995년 6월에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민주당을 승리로 이끄는 등 정계와의 끈을 놓지 않아왔다.
같은해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동교동계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총재가 됨으로써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김 전대통령은 1997년 10월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와 연대해 후보단일화를 이끌어내고 네 번재 대통령 선거에 도전 같은해 12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현 자유선진당 총재)를 힘겹게 누르고 15대 대통령선거에서 결국 당선됐다.
그의 당선은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여야간 정권교체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헌정사장 커다란 한획을 그은 것이었다. 이듬해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당시 그는 YS정부가 떠넘긴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재정, 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과 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2001년 8월 IMF의 지원자금 195억달러를 전액 상환하며 조기 졸업하는 성과도 거뒀다.
2000년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해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을 열어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내 남북관계에서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50여 년간 지속되어 온 한반도 냉전과정에서 상호불신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에의 새로운 장을 여는 데 크게 기여한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국민의 정부 5년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대통령의 아들들과 `2인자'로 불렸던 권노갑 전 민주당 최고위원이 비리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는 등 `옷로비' 이후 각종 비리의혹 사건은 정권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집권 기간내내 특정지역 인사편중 시비가 끊이질 않았다. 북한군의 서해 도발도 겪어야 했으며 그의 대북정책의 상징인 햇볕정책은 보수 등 반대 진영으로부터는 항상 `퍼주기'로 치부되며 현재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퇴임후에도 노무현 정부 시작부터 몰아닥친 대북송금 특검으로 남북정상회담 성과에 흠집이 가고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현 민주당 의원) 등 측근들이 `영어의 몸'이 되는 장면도 목격해야 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남북관계가 위기에 빠졌다고 비판하면서 민주개혁세력의 연대를 주문하는 등 왕성한 정치활동 때문에 정치 개입 논란도 끊이지 않아왔다.
이러한 파란만장한 영욕의 삶은 결국 8월 18일로 마침표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