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굵은 밤을 어디에서 주웠느냐고 물으니 고라우 산길이라고 했다. 고라우 산길이면 고향 마을에서도 인적이 드문 산길이다. 어린 시절 가을이면 매년 그곳에 사는 아이들이 다른 동네보다 먼저 떨어진 굵은 밤을 주워와 자랑했다. 아직 우리 집 밤은 익지도 않았는데 그곳의 밤은 일찍 익었다. 또 그 동네 아이들은 다른 동네에서는 쉽게 구경할 수 없는 송이를 따와서 자랑하고, 가까운 친구에게 하나씩 나눠주기도 했다.
그 아이들로 교실 전체에 송이 냄새가 나기도 했다. 그걸 하나 얻어 집에 가져가면 어머니가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다. 추석날 차례상에 올리는 박고지 챗국에 송이를 굵게 썰지도 못하고 성냥개비같이 가늘게 몇 가닥 썰어 넣어도 그 향이 기가 막혔다. 결국 식구들이 먹는 챗국이지만 추석 챗국에 송이를 썰어 넣으면 자손으로서도 조상 대접을 잘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어린 시절 그 친구에게 받은 송이도 여러 개였다. 지금처럼 비싸지 않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산에서 주운 알밤 사진을 본 다음 친구가 살던 동네에 송이가 나느냐고 물었다. 친구는 송이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라고 했다. 기후 탓인가, 하고 물으니 그런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고 했다. 송이는 소나무가 울창한 산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소나무가 굵지도 않고 중간쯤 자랐으되 산 전체의 나무들이 조금 비실비실한 모습을 보일 때 많이 난다고 했다.
왜 그러냐니까 송이는 소나무에 기생해서 자라는 버섯인데, 그래서 버섯에도 솔향기가 나는데 나무가 굵고 울울창창한 산에는 송이 포자들이 기생하여 번식할 수 없다고 했다. 간벌한 산에 송이가 사라지는 것도 그래서라고 했다. 친구 말로는 소나무 산을 잘 가꾸면 가꿀수록 송이는 점점 더 귀해진다고 했다. 그리고 산불이 한 번 나면 그 근방엔 한동안 송이가 자라지 못한다고 했다.
친구가 주소를 묻더니 며칠 후 토종 산다래 한 박스를 보내왔다. 청산별곡에 머루랑 다래랑 먹고 살아리랐다, 라고 노래한 바로 그 다래 열매였다. 도시에 와서 살면서 토종 산다래의 실물을 본 지도 20년은 더 된 것 같았다. 어릴 때는 동네 산보다 조금 더 깊은 산에 가면 바구니 하나 가득 따올 수 있을 만큼 흔한 게 다래였다.
그게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았다. 남쪽지방에서 바나나를 덜 익었을 때 따서 유통 중에 익혀서 팔 듯 산에서 나는 다래 역시 그랬다. 다 익을 때까지 기다려서 따면 그게 짓물러져 먹을 수가 없었다. 아직 다래 넝쿨에 덜 익은 채로 단단하게 매달려 있는 걸 따가지고 와서 조금은 따뜻한 곳에 놓아두면 저절로 조금씩 말랑말랑해지면서 익는다. 익지 않은 다래는 아리고 비려서 먹을 수가 없다. 어릴 때는 미처 익지 않은 다래를 손으로 꾹꾹 눌러 억지로 무르게 만들어 먹기도 했다.
다래는 큰 산에 가면 여전히 많지만 그걸 따서 효소로 판매하는 약초꾼 말고는 일부러 다래를 따러 다니는 사람도 없다고 했다. 다래를 잘 받았다고 인사하자 친구는 다시 두 손을 합친 것보다 더 큰 능이버섯 사진을 올려주었다. 그러면서 ‘가을산이 가난한 친정보다 인심이 흔하다’는 옛 속담을 들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