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종이 한 장 차이

입력 2024-06-2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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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 시절, 강원도 태백에 있는 병원에 파견을 갔던 때였다. 심산유곡에 위치해 사방이 절경인 곳이었다. 어느날, 야간 응급실 당직을 끝내고 인턴 동기와 늦은 아침을 먹으러 나가던 중, 안개에 쌓인 비경이 우리를 유혹하였다. 잠깐 뒷산에 산책이나 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산 중턱에 이르렀던 것이다. 둘 다 구두에 와이셔츠, 넥타이를 한 복장으로.

“누가 보면 회사 공금 횡령하고 산으로 도주하는 자들인 줄 알겠어.” 농담도 잠시, 곧 가파른 경사가 시작되자 미끄러지고 헛발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손, 두 발을 이용해서 나뭇가지를 부여잡으며 오르려 하고 있었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온몸을 때리기 시작하자 여름밤 모기의 습격처럼 성가시고 짜증이 나는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다더니….’ 하나, 우리의 불평에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비는 점점 더 거세어졌고, 산을 거의 내려왔을 무렵에는 전신이 비에 푹 젖어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해졌다. ‘물아일체란 바로 이런 거구나!’ 비와 우리는 하나가 되어 있었다.

하늘에서 쏟아내는 여름비는 샤워기의 물줄기와 같았다. 아니 더 포근하게 느껴졌다. 우린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자연과 하나 된 느낌으로 그 순간에서 빠져나오기가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기 어린 청춘이었던 것이다.

“원장님, 경찰에서 환자분을 모시고 왔어요.” 몇 달 전 퇴원 후, 소식이 끊겼던 환자였다. 약복용을 중지한 후 증상이 재발하여 길거리에서 옷을 다 벗고 소리를 지르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다시 내원한 것이다.

“왜 옷을 벗었어요?” “우주에 내 몸을 맡기고, 하나가 되려고요. 그 기분 알아요?” “알죠. 정말 날아갈 듯한 느낌이죠.” “역시 원장님은 내 맘을 이해해 주는군요.”

환자의 등을 토닥여주고, 병실문을 나섰다. 문득 창밖을 보니, 구름 한 점 없는 눈부신 파란 하늘이다.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며, 회색빛 진료실로 다시 들어가다 외마디 소리를 내뱉었다. “정말 끝내주었겠는데….”

최영훈 일산연세마음상담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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