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혁신, EU는 안전에 중점둬
어느길이 타당한지 깊이 성찰해야
미국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들의 역동성이 새삼 놀랍다. 압권은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MS)의 시가총액 1위 각축이다. 올해 1월 MS에 추월당한 애플은 지난 10일 ‘세계 개발자 회의’에서 인공지능(AI) 시스템을 선보인 것을 계기로 다시 선두 경쟁에 나섰다. 대단한 복원력이다. 지난주 한때 애플을 따라잡았던 엔비디아의 추격세도 무섭다. 작금의 기세로만 보면 단숨에 선두로 나선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MS와 애플, 엔비디아를 관통하는 테마가 있다. AI다. 연산 처리에 필수적인 그래픽 칩(GPU)에서 독보적 입지를 구축한 엔비디아는 말할 것도 없고 MS와 애플도 생성형 AI 혁신을 주도하는 오픈AI와 손잡으면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빅테크 3사의 시총은 각각 3조 달러를 웃돈다. 4조 달러 벽에 도전하는 3각 경쟁이 본격화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다들 ‘AI 날개’를 달고 끝을 알 수 없는 ‘AI 삼국지’를 써 내려갈 참이다.
숫자가 너무 크면 때론 감 잡기가 어렵다. 구체적으로 따져보자. 3개사 시총은 얼마나 큰가. 공교롭게도 유럽 주요 3개국의 국내총생산(GDP) 합산액이 비교 대상으로 안성맞춤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22년 기준 GDP는 독일 4조754억 달러, 영국 3조70억 달러, 프랑스 2조7840억 달러다. 다 합치면 9조8664억 달러다. 천문학적이다.
하지만 3사 시총도 만만찮다. 3개국 GDP 합산액에 버금간다. 미 AI 생태계엔 3사만 있는 것도 아니다. 시총 4위 구글, 시총 5위 아마존 등 다른 공룡기업도 득시글거린다. 역시 AI 날개를 단 익룡들이다. 미 빅테크의 시장 가치는 대체 얼마나 큰 것인가. EU는 뼈가 아플 것이다. 배도 아플 테고.
EU는 2차대전 후 미국과 함께 서방 질서를 지켜왔다. 먼 옛날엔 과학혁명을 주도한 전통적 강자이자 글로벌 리더다. 그러나 미국과 달리 AI 생태계 비슷한 것도 없다. 어디서 차이가 벌어졌나. 얼마 전 ‘부자 미국 가난한 유럽’을 출간해 두 체제를 객관적으로 저울질한 두 공동저자는 2007년 아이폰을 들고 나선 애플을 게임체인저로 지목한다. 이때부터 본격화한 정보통신기술(ICT) 혁명이 부침을 갈랐다는 것이다. AI 또한 그 연장선에 있다.
달리 표현하면, 운명을 바꾼 것은 애플과 같은 도전을 장려하는 문화와 그러지 않는 문화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자는 혁신에 개방적이고, 후자는 그렇지 않다. AI 관련 법제부터 그렇다.
EU는 지난 3월 세계 최초로 AI법을 가결했고 지난달 최종 승인했다. 인간 기본권을 보장한다는 것이지만, AI 위험을 4단계로 나누고 차등적 규제를 가한다는 데서 알 수 있듯 주안점은 규제에 있다. 15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 등은 애플이 EU 규제망의 하나인 디지털시장법(DMA)에 걸려 매일 5000만 달러씩 벌금을 물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또 다른 빅테크인 메타가 EU를 의식해 자사 AI챗봇인 ‘메타AI’ 출시를 보류한 일도 있다. 미국의 AI 이니셔티브법은 다르다. 기술 발전 지원에 방점이 찍혀 있다.
유럽국제정치경제센터(ECIPE) 등의 통계에 따르면 EU는 GDP(지난해 17조8187억 달러)로 미국(26조8545억 달러)의 맞상대가 안 된다. GDP가 완벽한 잣대인 것은 아니지만 체급은 이미 다르다. 앞서 인용한 ‘부자 미국…’은 경제 격차가 “쩍 벌어진 악어의 입처럼 계속해서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케냐 출신으로 유엔 생물다양성 협약(UNCBO) 사무총장을 지낸 미 하버드대 교수 칼레스투스 주마는 신기술 위험과 편익을 인식하는 국가별 특징을 분류해 그 결과를 ‘규제를 깬 혁신의 역사’에 담았다.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미국에서 제품은 위험성이 입증될 때까지 안전하다. 프랑스에서 제품은 안전성이 입증될 때까지 위험하다. 영국에서 제품은 안전하다고 입증되더라도 위험하다.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서는 제품이 없어도 위험하다.’ 뭔 뜻인가. 미국과 EU가 AI 이슈에 거의 정반대로 접근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본질적 문화의 소산이란 얘기다.
우리 앞에 크게 두 길이 있다. 미국이 가는 길과 EU가 가는 길이다. 어디로 가야 하나. 22대 국회는 AI기본법의 결론을 내기에 앞서 주마의 분류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쩍 벌어진 악어의 입’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깊이 생각해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