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재벌 2세, 재벌 3세. 이 판에선 너무 흔한 그룹이죠. 재벌 며느리, 재벌 친구, 재벌 여자친구, 재벌 남자친구는 말할 것도 없고요. 오히려 이들을 둘러싼 역할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아니, 거의 없다고 단연 말할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이곳은 바로 대한민국 드라마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만나긴 너무나 어렵지만, 드라마에선 너무 흔한 그 집단, 재벌. 그저 TV를 보다 보면 저 사람은 월요일 재벌, 저 사람은 수요일 재벌, 저 사람은 토요일 재벌… 해당 요일에 만나는 재벌을 종류별로 다양하게 관람할 수 있죠.
이토록 흔한(?) 직업이지만 주인공을 도맡아 하는데요. 현재 방송 중인 tvN ‘웨딩 임파서블’, ‘눈물의 여왕’에도 주인공은 재벌이죠. 둘 다 주인공은 ‘재벌 3세’인데요. 90~2000년대 드라마에서는 ‘재벌 2세’가 그 자리를 채웠다면,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그 자녀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시간의 변화를 기가 막히게 반영한 셈이죠.
요즘 드라마 속 재벌가는 대부분 부모는 일찍 죽거나 일련의 사고로 일선에서 물러나고, 재벌 회장 할아버지(혹은 할머니)가 손자만 바라보고 경영권을 물려주려는 상황이 많은데요. 자녀에게 물려줄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손자ㆍ손녀의 사랑 사업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일들이 늘어났다는 점입니다.
앞서 설명한 두 드라마도 이 궤를 따라가는데요. ‘웨딩 임파서블’ 속 재벌 LJ그룹의 회장 현대호(권해효 분)은 평범한 여성과 결혼하려는 이도한(김도완 분)의 선택을 허락해주죠. ‘눈물의 여왕’ 퀸즈그룹의 회장 홍만대(김갑수 분)과 부회장 홍범준(정진영 분)도 홍해인(김지원 분)이 원하는 신입 사원 백현우(김수현 분)와의 결혼을 진행합니다. 과거 드라마에서 흔히 보였던 ‘돈봉투 거절’은 요즘은 좀 지난 얘기죠.
태도가 달라졌다고 해도 주인공의 자리를 놓치진 않는데요. 23일에 종영한 SBS ‘재벌X형사’에선 아예 대놓고 제목이 재벌이었죠. 한수그룹 막내아들, 재벌 3세 진이수(안보현 분)가 재벌이자 형사로 모든 사건을 해결합니다. OTT도 다를 바는 없는데요. 최근 공개된 디즈니플러스의 ‘로얄로더’도 강오그룹이라는 재벌이 등장하고 강인하(이준영 분)가 메인 캐릭터로 나오죠. 티빙 오리지널 ‘피라미드 게임’에서도 해당 게임의 창시자인 백하린(장다아 분)이 재벌 백연그룹의 손녀로 등장합니다.
모든 재벌의 현 배치(?)를 잘 보셨나요? 자 이제 이들의 과거를 한번 들어가 봅시다. 그 재벌의 역사 속으로 말이죠. ‘재벌X형사’의 안재현은 전작 tvN ‘이번 생도 잘 부탁해’에서 MI그룹의 재벌 2세로 등장했고요. JTBC ‘이태원 클라쓰’에서도 장가의 장남 후계자 장근원 역으로 분했죠. ‘재벌X형사’ 속 안보현의 파트너 박지현은 이름부터 재벌인 또 다른 드라마 JTBC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순양그룹의 손자며느리로 나왔습니다.
‘눈물의 여왕’ 김지원은 SBS ‘상속자들’에서 RS 인터내셔널 상속자 유라헬로 등장한 바 있죠. 극 중 김지원의 동생인 곽동연도 tvN ‘빈센조’에서 바벨그룹 회장을 맡아 재벌가를 거쳤습니다. 김지원과 묘한 관계를 형성 중인 박성훈 또한 넷플릭스 ‘더 글로리’에서 아버지의 도움으로 호의호식하는 골프 리조트 대표로 나왔죠.
‘눈물의 여왕’ 작가 박지은의 작품에도 재벌가는 일상인데요. 전작인 tvN ‘사랑의 불시착’에도 퀸즈그룹이 등장합니다. 손예진이 재벌가 막내딸로 나오죠. SBS ‘푸른 바다의 전설’에서도 이민호가 부동산 재벌인 아버지 곁을 떠난 아들로 그려졌고요. SBS ‘별에서 온 그대’에서도 S&C그룹이라는 재벌이 나옵니다. 이 중 이 그룹 총수 막내아들 박해진이 전지현을 짝사랑하는 역할이죠.
배우도 작가도 모두 현 작품, 전 작품, 전전 작품 모두 재벌을 안 거친 이들이 없는 상황인데요. 그룹 이름만 바뀌었을 뿐 다들 성공과 돈, 그리고 여유가 넘치지만 고상함을 과시하는 재벌이라고 정형화돼 있는 비슷한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수많은 주인공을 제치고 ‘재벌 배우’로 우뚝 선 이는 따로 있는데요. 바로 배우 나영희입니다. 현재 ‘눈물의 여왕’에서도 퀸즈그룹 사모님인 나영희는 정말 난다긴다한 대부분의 재벌 사모님 역할을 도맡아 해오고 있죠. 바로 전작인 JTBC ‘끝내주는 해결사’에서는 재벌까진 아니지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로펌 ‘차율’의 회장이었고요. SBS ‘원더우먼’에서는 한주그룹의 안주인이었습니다.
JTBC ‘뷰티 인사이드’에서는 선호그룹의 외동딸이자 선호 홀딩스 대표이사 임정연으로 분했고, KBS2 ‘황금빛 내 인생’에서는 해성그룹의 장녀이자 해성 F&B 대표로 고상함의 끝을 보여줬죠.
특히 나영희는 ‘갑질 사모님’ 역할을 기가 막히게 소화 중인데요. 진짜 재벌이 저럴까? 싶은 격한 예시들이 여럿 소개됩니다. 겉으론 세상 품위 있고 교양있지만 평범하거나 부족한 며느리를 구박하고, 자신의 눈에 성이 차지 않은 자식에게 핀잔주기 일쑤고요. 정말 오버한다 싶은 예절을 마치 ‘있는 집은 이래야 돼’라는 당당함으로 선보이죠. 이제는 으레 나영희가 나온다는 드라마는 ‘재벌 드라마’로 유추할 수 있을 정도인데요. 박지은 작가와도 많은 드라마에 조연과 특별출연으로 친분을 다져왔습니다.
이 나영희가 어김없이 재벌 사모님으로 나온 ‘황금빛 내 인생’을 실제 재벌이 시청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죠. 바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입니다. 한국의 ‘찐 재벌’ 삼성 회장이 시청하고 감상문(?)이 나온 최초의 드라마가 아닐까 싶은데요.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재용 회장이 수감 기간 동안 해당 드라마를 시청 후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습니다.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재벌이 고압적으로 갑질을 하는 장면을 보고 실제 오너 일가가 시민들에게 어떤 식으로 비치는지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놀랐다는 후문이죠.
‘찐 재벌’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모습들을 시민들은 ‘재벌은 저럴 거야’라고 인식하고 있음에 놀랐다는 이야기는 색다른 감상평으로 현재까지 회자되고 있습니다.
드라마에 재벌이 이토록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기도 한데요. 현재 삶에서 부딪히는 많은 일이 “내가 재벌이라면 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동반되기 때문이죠. 또 작가가 상상력을 펼치는 모든 상황에서 “저게 말이 돼?”라는 장면도 왠지 재벌이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시청자들이 순순히 받아들이는 이유도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재벌의, 재벌에 의한, 재벌을 위한 드라마로만 흘러가는 건 ‘익숙함’과 싸워야 하는 일인데요. 매번 신데렐라와 온달왕자를 만들고, 서민들의 기회를 빼앗고, 높은 곳에서 항상 내려다보는 이 흔하디흔한 재벌(?). 이제는 흔한 재벌이 아닌 흔하지 않은 다른 이의 등장을 좀 기대해 보고 싶은 일주일입니다. 아 ‘사짜’도 아닌 흔한 주인공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