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시절 희귀 면역결핍 질환으로 툭하면 폐렴을 앓는 4살 아이 J가 있었다. 아빠와 외국인 엄마는 바빴고 연로한 할머니가 보호자로서 J를 정성껏 돌보았다. 잊을 만하면 입원했기 때문에 자주 마주쳤고 나는 제법 J를 귀여워하고 아꼈다. 그리고 잦은 병원 생활에 지칠 법한데도 사랑으로 J를 돌보는 할머니를 안쓰럽게 여기고 존경의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다.
퇴원한 지 한 달 만에 응급실에서 또 J를 만났다. 만나서 반가운 장소가 아님에도 오랜만에 본 J의 귀여운 얼굴에 반갑게 웃어주었다. 폐렴으로 입원을 위해서 온 J의 다리에 깁스가 되어있었다. 할머니에게 들어보니 혼자서 놀다가 넘어져 부러졌다는 것이다. 자주 아픈 J가 다리까지 부러지다니 속상한 마음과 할머니에 대한 걱정에 위로를 전했다. 그리고는 쏟아지는 다른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응급실에 찾아온 경찰이 J의 할머니를 찾았다. 내가 적어놓은 기록을 보신 교수님이 할머니에게 몇 가지 더 묻더니 아동학대 의심으로 신고를 하셨다. 할머니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는 내가 더 당황하여 교수님께 찾아가 “그러실 분이 아니다” 하고 대신 변명을 늘어놓았다. 교수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넘어져서 대퇴골 골절이 저 나이에 흔합니까? 할머니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학대가 있었을 수 있어요. 그럴 사람 아니다 하고 넘어가면 안됩니다.”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했다. 그럴 리 없는 사람이라고 먼저 결론 짓는 것은 내 역할이 아니었는데 실수였다. 다행히 경찰 조사 후에도 별 혐의 없이 마무리되었고, 할머니는 속상해하셨지만 나는 그때의 충격을 항상 기억한다. 나의 의무를 기억한다. 괴로움에 빠진 아이들을 모르고 지나치지 않도록. 유새빛 소아청소년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