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우리 가족, 친구, 동료를 떠나보내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삶의 아픔이다. 일상에 지쳐 스스로의 삶을 놓기전, 조금 더 빨리 이웃의 목소리에 귀를 열고 말을 걸며 다가서려 하지만 쉽지 않다. 그럼에도 나와 주변 이웃들에게 드라마 속 한 구절처럼 “멈추지 말고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의사 한 명이 열심히 뛰어다닌다고 자살률이 낮아지지 않습니다. 한국이 자살률 1위 국가라는 오명에서 벗어나려면 전 국민이 ‘자살예방 활동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회·경제적 원인이 자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국민의 생명보호를 위해 다양한 자살예방 활동을 펼치는 황태연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이사장은 최근 서울 중구 재단사무실에서 본지와 만나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언제나 접근할 수 있는 ‘보편적 자살예방’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자살률 인구 10만 명당 25.2명,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1위’라는 불명예를 벗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황 이사장은 ‘자살 위험’에 놓인 나와 이웃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은 ‘생명존중문화운동을 통한 안전한 희망사회 실현’을 미션으로 2021년 1월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자살예방법)과 민법 등을 근거로 설립됐다. 황 이사장은 같은 해 4월 재단 출범과 함께 초대 이사장으로 합류했다.
황 이사장은 “이전까지는 2012년 중앙자살예방센터, 2014년 중앙심리부검센터 등 민간이 운영하는 기관이 대부분이었다. 공공재단이 두 민간 센터의 역할을 흡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살예방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며 “재단은 현재 자살 관련 인식개선 캠페인, 자살예방 사업 및 유가족 지원, 자살예방 교육 등 자살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담당하는 구심점”이라고 소개했다.
재단은 한국의 높은 자살률에 대한 충격을 사회적 관심으로 전환하기 위해 ‘13352+1393=0’이라는 구호를 만들어, 올해 한국 PR대상 공공·공익 캠페인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 캠페인에는 2021년도 자살한 사람의 수 1만3352명에 자살 예방 핫라인 1393번을 더해 자살 발생을 0으로 만들자는 목표를 담았다.
황 이사장은 “사람들은 정신질환이 있거나, 큰 시련을 겪은 고위험군을 대상으로 벌이는 직접적인 자살 예방 활동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자살 수단이 되는 물건을 제거하고, 다리 난간에 안전장치를 설치하는 것도 중요하다”면서 “하지만 가장 기본 활동은 ‘보편적 예방’이다. 자살에 대한 평범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 누구나 자살 위험에 노출될 수 있고,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를 돌봐야 한다”고 당부했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보편적 자살예방’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수적임에도 그동안 논의가 부족했다. 그 이유에 대해 황 이사장은 자살을 일반적인 대화 주제로 꺼내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를 꼽았다.
그는 “자살 사망자와 유가족에 대한 편견도 상당하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사회·경제적 주변부로 밀려나는 계층이 증가해 자살예방 사각지대가 넓어졌다. 농촌에 거주하는 노인, 도시에 거주하는 청년 1인 가구, 여성, 외국인 노동자, 청소년 등의 자살률이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 특히 황 이사장은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여기며 무관심 속에 방치해 왔기 때문일 것”이라며 “같은 이유에서 사회학자들은 자살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
최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방영된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 정신질환은 물론 정신질환자가 퇴원 후 자살에 이르는 이야기가 다뤄져 주목을 받았다. 황 이사장은 “몹시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중증 정신질환자의 퇴원 후 1개월 내 자살률이 높다. 병동에서 지낼 때는 증상이 호전되면서 현실 세계를 접할 자신감을 얻지만, 퇴원 후 사회 적응에 실패하는 것이다. 지역사회의 보편적 돌봄 체계가 부족하다”고 짚었다.
재단은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누구나 수강할 수 있는 ‘생명지킴이 교육’을 실시한다. 황 이사장은 “정신건강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자신과 타인을 돌보는 방법을 익힌 사람이 많아질수록 사회적 돌봄 망이 촘촘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우리나라 자살예방 체계에 대한 아쉬운 점도 있다. 황 이사장은 자살예방 체계 관련 대국민 인식조사 결과를 보면 문제가 명확히 드러난다고 했다. 조사에 따르면 힘들 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 말에 ‘시간이 지나면 나을 것 같아서’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라는 답변이 매번 가장 많은 이들의 선택을 받는다. ‘어디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모른다’는 답변도 흔하다.
황 이사장은 “정신건강 상담과 치료 접근성은 물론, 서비스에 대한 신뢰도도 낮다. 우울증이나 자살사고는 감기가 지나가듯 나아지지 않는다. 조기에 개입해 건강을 되찾도록 치료해야 하는데, 일상 속에서 손을 뻗을 수 있는 도움 창구를 찾기 어렵다”고 아쉬워 했다.
정부가 그동안 분산 운영됐던 자살예방 상담번호를 내년부터 109번으로 통합하고, 자살예방 의무교육을 본격적으로 시행하는 등 자살예방 정책을 강화한다.
황 이사장은 “작년 미국에서 911번과 자살 상담, 정신과 상담 번호를 988번으로 통합했다. 최근 캐나다도 1년여간 준비를 거쳐 자살 상담번호를 통합했다. 흩어진 인력과 시스템을 하나로 모아 필요한 곳에 효율적으로 투입할 수 있게 됐다”면서 “도움이 필요한 급박한 상황에 쉽게 떠올릴 수 있어, 서비스 접근성도 높아졌다”고 통합 이유를 제시했다.
재단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는 각각 다른 부처와 지자체에서 자살예방 상담 1393번, 정신건강상담 1577-0199번, 청소년 상담 1388번 등을 운영되고 있다. 황 이사장은 “109번 신설을 시작으로 상담 인력과 시스템도 차차 통합적으로 확충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자살예방 상담번호 통합과 함께 재단은 내년 ‘보편적 자살예방’ 활동으로 더욱 바빠질 예정이다. 올해 4월에 정부가 제5차 자살예방 기본계획을 발표했고, 보건복지부와 재단이 함께 시작하는 새로운 활동이 많다.
황 이사장은 “‘생명존중 안심마을’을 전국에 지정해 관내 교육기관, 의료기관, 행정기관 등 각 주체가 통합적으로 자살예방 프로그램을 구축하도록 도울 계획”이라며 “또 인터넷상에서 우울감과 자살사고를 공유하는 유해 게시글을 막기 위해 모니터링 센터도 준비 중”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지금까지는 자원봉사자 인력에 의존해 모니터링을 했지만, 앞으로는 더욱 강화한 자체 센터를 운영할 예정이다. 그는 “자살예방 생명 지킴이 교육 콘텐츠 개발도 주요 목표다. 내년 7월부터 병원과 학교, 공공기관 등을 대상으로 자살예방 교육이 본격 시행된다. 교육 대상별로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양질의 교육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살예방을 위해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황 이사장은 “일상 속에서 서로 돌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이어 그는 “생명 지킴이 활동은 정부나 의료진만 할 수 있는 거창한 일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주변 이웃에게 관심을 두고, 서로 안부를 물으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확실한 자살예방 활동”이라며 “정신과 의사 한 명이 시내를 돌아다니며 자살예방을 외친다고 사회가 달라지지 않는다. 전 국민이 함께 참여할 때 자살률이 낮아질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고려대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호주 멜버른 대학교에서 국제정신보건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용인정신병원에서 23년간 환자를 돌보며 진료원장을 역임했다. 대외 활동으로 세계보건기구(WHO) 정신사회재활·지역정신보건 협력기관장을 지냈다. 국립정신건강센터 초대 정신건강사업부장으로 재직하며 국가 정신건강 정책 수립을 지원했으며, 정신질환자 인권보호를 위한 ‘입원적합성 심사위원회’를 도입해 안착시키는 과정에서 실무를 지휘했다. 정부 정신건강사업을 수행하며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2021년 4월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앱,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