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12일 내놓은 '은행 지배구조 모범관행'의 핵심은 투명성과 공정성을 위해 CEO 승계절차를 앞당기고 내부와 외부 후보자 간 차별을 없애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금융지주가 운영 중인 부회장직이 불공평을 심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회장 승계 핵심 코스로 거론되는 부회장직이 '지배구조 세습'을 단단히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금융지주사 입장에서는 '2인자' 자리를 유지할지 말아야할지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이날 CEO 선임 과정에서 내·외부 후보자 간 공평한 경쟁을 강조하면서 금융지주사가 운영 중인 부회장직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이 원장은 이날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은행지주 이사회 의장 간담회 후 기자들과 만나 “부회장 제도가 과거 특정 회장이 셀프 연임하는 형태로 운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일보된 제도는 맞다”면서도 “한편으로는 부회장 제도가 내부적으로 폐쇄적으로 운영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시대정신에 필요한 신인 발탁이나 외부의 경쟁자 물색을 차단하는 등 부작용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다”면서 “그 부분에 대해서도 지주 이사회 의장들이 공감했다”고 덧붙였다.
금융지주사의 부회장직은 지주 핵심전략 총괄 책임자인 동시에 사실상 차기 회장 후보군을 육성하는 프로그램으로 활용됐다. 계열사 CEO로 일정 기간 경험을 쌓은 후 인정받으면 임기가 끝나고 부회장직으로 승진하는 방식이다.
4대 금융지주 중 현재 부회장직을 운영하고 있는 곳은 KB금융과 하나금융지주 두 곳이다. KB금융은 지난해 조직개편을 통해 양종희, 허인, 이동철 등 3명의 부회장을 선임했다. 양 부회장의 회장 취임과 동시에 나머지 2명의 부회장이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공석이다.
하나금융은 이은형 부회장과 박성호 하나은행장, 강성묵 하나증권 사장 등 3인 부회장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 3인 부회장 임기는 올해 말까지다.
두 금융사 모두 부회장직 유지와 관련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KB금융 관계자는 "통상 연말에 조직 개편을 하고 경영진 인사가 나오기 때문에 부회장직 존폐와 관련해서는 연말이 돼야 알 수 있다"고 답변했다.
하나금융 관계자도 "연말 인사까지 상황을 지켜봐야한다. 현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라고 선을 그었다.
금감원은 또 공정한 경쟁을 위해 외부 후보에게도 비상근 직위를 부여해 은행의 역량개발 프로그램에 참여시킬 것을 권고했다. 은행권에서는 이같은 조치가 실효성이 낮다고 판단하고 있다.
A은행 관계자는 "외부 후보가 현직인 경우 비상근 직위나 CEO 승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 한계가 있다"며 "결국 차기 회장 후보군을 특정해온 관행을 손보는 방향으로 갈 경우 부회장직이 폐지 될 가능성도 있다"고 예상했다.
한편, 이번 모범관행에 대해 전문가들은 의미있는 부분이 있다고 평가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업의 경영승계에 정부가 개입하는 건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다"면서도 "우리나라의 경우 은산분리에 의해 금융사에 주인이 없기 때문에 혼란을 막기 위해서 가이드라인 제시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모범관행이)실효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며 "금융당국이 CEO 선임을 위한 구체적 요건을 제시하고 있어, 금융지주사 등 금융사의 CEO선임과정에 충분히 반영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서 교수는 다만 "이사회 독립성 강화에 대한 구체적 방안도 함께 제시될 수 있으면 좋을 듯 하다"며 "사외이사의 거수기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는데, 이를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 마련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