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혼을 해서 우리 가정이 있는데도 계속 면접교섭을 시켜줘야 되나요?”
찬성씨는 애써 질문처럼 포장했지만 그 표정과 말투에서 이미 아이들과 친모 혜수씨의 면접교섭을 ‘시켜 줄’ 생각이 없다는 것과 그럼에도 법원에서 면접교섭을 권하는 것이 불만이라는 뜻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버님!”
찬성씨를 보며 원래는 ‘피신청인’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전처 혜수씨와의 2라운드 싸움을 면접교섭전(戰)으로 벌이고 있는 현실을 굳이 환기시켜서 더 날이 서게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여, 저는 마치 학교 선생님이 학부모 면담하듯이 ‘아버님’이라고 한 글자씩 눌러 부르고는 이어 말했습니다.
“면접교섭은 아버님이 ‘시켜 주고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권리이고요. 아이들에게는 ‘우리’ 가정이 아버님과 새엄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친엄마와도 ‘우리’ 가정이에요.”
그러자 이제는 그 옆에 앉아 있던 찬성씨의 재혼 배우자 유진씨가 또 질문으로 포장된 항의를 합니다.
“지금 우리끼리는 아이들이 너무 잘 지내고 있는데 그래도 굳이 면접교섭을 해서 애들에게 혼란을 줘야 하나요? 그리고 면접교섭 한번 하려면 애들도 스케줄이 다 깨져서 싫어하는데 아이들 의사도 존중해 주어야 하지 않나요? 저는 애들 엄마 만나라 만나라 하지, 한 번도 못 만나게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도 지금은 애들이 안 만나겠다고 그러는 거예요. 아이들 의견도 무시하고 강제로 만나게 하는 게 면접교섭인가요?”
그 옆에서 찬성씨도 시종 고개를 끄덕이며 유진씨의 말에 힘을 보태 주었습니다.
“지금 ‘관계인’께서 하신 말씀은”이라고 유진씨의 절차상 지위를 환기시키면서 제가 말을 이어갔지요.
“그래도 아버님과 관계인께서 재혼 가정을 잘 가꾸고 계시고 또 아이들 의사를 잘 존중하려고 노력하고 계시다는 것으로 보여 참 훌륭한 것 같아요. 하지만 예컨대 아이들이 ‘학교 가기 싫어’라고 말한다고 곧바로 ‘그래, 학교 가지 마라. 너의 의사를 존중해 줄게.’라고 하진 않잖아요. 왜 학교를 가기 싫다고 하는지, 학교생활에 무슨 문제나 어려움이 있는지, 어떻게 하면 학교를 기꺼이 가게 할 수 있을지 등등 아이와 대화를 충분히 나눠 보지요. 그리고 아이의 학교 가기 싫은 문제를 잘 해결해서 아이를 다독여 학교를 결석하지 않고 보내서 잘 적응하도록 할 방법을 찾아보겠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학교를 원만히 잘 다니게 하는 것이 대체적으로 아이의 복리에 부합하니까요. 아이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건 아이가 학교 가기 싫다고 말하는 것에 진지하게 반응해서 잘 들어주고 함께 그에 대한 좋은 해결 방안을 찾아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요. 그와 마찬가지로 아이들과 친엄마간의 면접교섭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이들의 복리에 부합할 겁니다. 재혼 가정의 아이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충성갈등’에 의한 표면적 거부 의사에 기계적으로 따르면 안 되고요.”
제 딴에는 가능한 한 알아 듣기 쉽게 설명해 드린다고 길어진 말에 찬성씨와 유진씨의 얼굴은 오히려 더 마뜩찮은 표정으로 구겨져 갔습니다. ‘저 판사는 뭐 알지도 못하고 따박 따박 맞는 말이랍시고 길게 늘어놓나’ 싶은 모양으로 말이죠.
“우리는 그런 상황이 아니고요.” 찬성씨는 답답한지 입을 다물어 버렸지만 유진씨는 몸을 당겨 앉으며 반박을 했습니다.
“원래도 애들 엄마가 면접교섭을 제대로 안 해서 애들이 이제는 싫어하는 거예요. 애들도 학원이다 뭐다 스케줄이 있는데 일방적으로 시간을 정하고 막상 약속을 안 지키고 맘대로 연락도 없이 늦거나 또 막 변경하고요. 그러니까 애들도 피곤해서 엄마 안 보겠다고 하는 거라고요.”
이쯤 되니 혜수씨도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나서서 한 마디를 합니다.
“판사님, 제가 전화하면 받지도 않고 문자를 보내도 전혀 답장을 안 하는데 제가 뭘 일방적으로 할 수 있겠어요. 한 달에 한 번 겨우 볼 때도 애 학원 보충수업 핑계로 애들을 못 만나게 합니다. 벌써 애들 못 본지 네 달도 넘었어요. 이럴 거면 차라리 애들을 제가 키우고 싶어요. 저쪽은 자기들끼리 살면 되잖아요.”
위의 대화는 제가 담당했던 어느 재혼 가정의 면접교섭 사건에서 진행되었던 내용을 재구성한 것인데요. 이혼 후에 재혼을 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전처와 전남편 간에, 더구나 한쪽이 재혼까지 한 마당에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고 오해나 분쟁이 생기는 것 역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에 위와 같은 형태로 면접교섭을 둘러싸고 양육 분쟁이 전개되는 것은 드물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혼 후 재혼이란 것과 아이들을 전처 또는 전남편과 계속 면접교섭하게 하는 것을 어떻게 양립시킬 수 있을까요. 정말 면접교섭이 이렇게 어렵다면 과연 재혼에도 불구하고 면접교섭을 꼭 해야 하는 걸까요. 아이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 분쟁에 계속 노출되는 것, 또는 재혼 가정의 안정이 방해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면접교섭을 안하고 각자 따로 평안하게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는 말씀을 분명히 먼저 해 놓고 재혼 가정의 면접교섭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양육 부모의 재혼이건, 면접교섭 부모의 재혼이건, 재혼 그 자체가 면접교섭 중단 또는 거부 사유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전제를 먼저 못 박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앞서 본 찬성씨나 친모 혜수씨, 새엄마 유진씨의 경우, 그리고 유사한 많은 부모님들이 쉽게 간과하고 계신 것이 바로 ‘면접교섭은 자녀의 권리’라는 사실입니다. 즉 자녀는 부모로부터 양육 받을 권리가 있고 여하한 사정으로 한쪽 또는 양쪽 부모와 떨어져 살게 되더라도 그 부모와 연락하고 정기적으로 만나며 그 관계를 유지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 민법 제843조, 제837조에 명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헌법 제6조에 따라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이 있는 유엔 아동권리협약 제18조와 제9조에도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면접교섭은 양육 부모라고 해서 ‘시켜주고 말고’ 할 권한이 있지 않고 면접교섭 부모라고 해서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선택 사항이 아닌 것이지요. 이혼해도 부모 모두 상대 부모를 자녀와 정기적으로 만나고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대 부모로부터도 아이가 충분한 양육시간을 제공받을 수 있도록 상호 여건과 상황을 조성하고 그에 필요한 협력관계를 구축해야 할 ‘의무’가 ‘권리자’인 자녀를 상대로 부모 쌍방에게 지워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 중 한 쪽이 재혼한다고 해서 그 법적 의무가 변화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양육자의 재혼이 자녀로 하여금 양육자의 새 배우자를 ‘새엄마’ 또는 ‘새아빠’로 받아들이게 할 권원이 되지 못하고 이를 강제할 권한이 양육자에게 있지 않을 뿐더러, 그러한 관계를 아이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엄마나 아빠는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나에게 좋지 않은 배우자였다 해서 아이들에 대해서도 나쁜 엄마 또는 아빠라고 치부해서는 안 되고(실제로 배우자로서는 좋지 않더라도 아이들에게는 좋은 부모님들이 많습니다), 설령 아이들에 대해서 실제 썩 좋은 부모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이를 ‘갈아치울’ 수 있는 것처럼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좋든 나쁘든 그가 아이들의 유일한 친부 또는 친모니까요.
그리고 면접교섭자의 재혼 역시 그 스스로 전혼 자녀의 면접교섭을 포기할 사유나 양육자에 의해 면접교섭을 중단 또는 거절당할 사유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다시 반복하지만, 면접교섭자는 자녀에 대해 ‘의무자’이고 양육자도 자녀에 대해 ‘의무자’이기 때문이지요.
채무자들이 모여서 채권자를 앞에 놓고 ‘나는 채무 갚기를 포기하겠다’거나 ‘상대의 채무는 포기시키겠다’고 할 하등의 권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채권자만이 ‘내 채권을 포기하겠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데, 다만 여기서 아동은 부모와의 면접교섭에 대해서는 자신의 복리 또는 아동 자신의 최선의 이익에 반하는 경우만 중단 또는 제한될 수 있는 것이기에 실상은 아동 자신도 함부로 포기할 수 없는 성격의 권리인 것입니다(예를 들어 아이가 스스로 초등교육 받을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아이를 위해서 초등학교에 보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결국 자녀의 부모에 대한 면접교섭권, 다시 말해서 이혼하고 따로 사는 부모로부터도 충분한 양육시간을 제공받을 자녀의 권리는 양쪽 부모는 물론 자녀 그 자신도 포기할 수 없는 권리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은 이혼 과정(이때부터 별거하는 경우도 많으므로) 및 이혼 직후부터 자녀가 비동거부모로부터도 충분한 양육시간 확보, 즉 면접교섭을 할 수 있도록 양육자와 비동거부모가 양육파트너로서의 협조적 관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쪽이 재혼을 하는 경우에 ‘양육자의 배우자’ 또는 ‘비동거부모의 배우자’ 역시 자녀의 양육에 자연스레 관여할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이라면, 그 배우자들도 자녀에 대한 ‘확장된 양육 네트워크’ 안에 느슨하게 들어오면 족합니다.
즉 그 배우자들은 재혼한 ‘배우자의 동거 자녀를 함께 돌보는 사람’ 또는 ‘배우자의 면접교섭 자녀를 함께 만나서 시간을 함께 보낼 수밖에 없게 되는 사람’으로서 그 선에서 자녀들과 관계를 맺고, 배우자의 전처 또는 전남편에 대해서도 필요 최소한도의 협조적 태도는 취해야죠. 친하게 지내라는 말이 아니라 자녀의 면접교섭을 위해 연락을 주고 받고 자녀가 왕래하는데 필요한 지원을 원만히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형태로 그 어른들 모두 필요한 최소한도의 협력을 하면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양육 네트워크로서 한 자녀를 돌보며 키우면 됩니다.
어른이라면 직장 동료나 상사, 거래처 사람 기타 업무상 필요한 사람들과 아무리 싫어도 비즈니스 관계에서 개인적 감정을 이유로 관계를 끊지는 않지요. 다른 모든 비즈니스보다 가장 중요한 ‘자녀 양육’에 관해 자녀를 둘러싼 중요한 관계들에 대해서도 어른이라면, 특히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충분히 협조적인 관계를 상호 유지하며 지낼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한 이혼 부모님들은 많이 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소위 ‘확장형’ 모델이 종래 재혼 가정의 ‘대체형’ 모델보다는 더욱 성숙하고 건강하며 여러 의미에서 실패할 가능성도 적다고들 학자들은 말합니다.
큰 아이들의 경우 재혼한 부모의 배우자에게 ‘엄마’나 ‘아빠’라고 부르게 하면 그 말이 안 나오는 경우가 많고 그것 자체가 재혼 가정의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으니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맡기는 것이 좋습니다. ‘아줌마’나 ‘아저씨’라고 부르더라도 섭섭해 하지 않고 말이죠. 왜냐하면 이미 ‘엄마’와 ‘아빠’는 있으니까요.
반면 좀 더 어린 아이들의 경우는 자기를 돌봐주는 양육자에게 친부모가 아님에도 자연스레 너무 쉽게 ‘엄마’ 또는 ‘아빠’라고 말이 나오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엄마’가 둘 또는 ‘아빠’가 둘인 것이 혼란일 것은 없습니다. 제 경우 부모들과 아이들에게, 면접교섭 하는 친아빠 만나서 ‘아빠’라고 부르고 함께 사는 새아빠에게도 ‘아빠’라고 부르되, 그 둘을 구별해서 칭해야 할 때는, 예컨대, 사는 곳에 따라 한 쪽은 ‘천안 아빠’, 다른 한 쪽은 ‘인천 아빠’와 같은 식으로 구분해서 부르도록 정리해 주면, 아이들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부모들, 어른들이 혼란스러워 하고 불편해 하면 아이들도 혼란스럽고 불편해 하고 부모들, 어른들이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그와 같이 가르치면 아이들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그와 같은 관계에서 아이들이 양육자 및 그 배우자와 함께 지내는 양육시간(parenting time)과 면접교섭자 및 그 배우자와도 함께 지내는 면접교섭시간(역시도 성질은 똑같은 양육시간입니다)을 아이들의 나이, 발달 수준, 생활 방식(life style) 기타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아이들의 복리에 부합하게 잘 배분하여 시간표를 짜는 것이 필요할 것이고, 이를 원만하고 평온하게 이행할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바로 건강하고 성숙한 이혼 부모의 모습일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보다 성숙하고 부모가 자녀를 더 사랑하기에, 부모는 이혼과 재혼 등 삶의 허들을 넘어 가는 과정에서도 부모의 이해와 편이보다는 자녀의 복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자녀의 면접교섭에 관한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면서 자녀를 키우는 가정생활을 잘 영위해 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현재 수원지방·가정법원 안산지원에 재직 중이며 아동의 최상의 이익을 위해 면접교섭의 중요성 및 바람직한 방법을 안내하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