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압박에 상생기금 조성 ‘미봉책’
BoA·씨티銀 서민금융 확대 본받길
최근 대통령이 ‘종노릇’, ‘갑질’ 등의 극단적인 표현을 쓰면서 은행의 서민금융 소홀을 질타하자 은행권은 상생금융을 통한 대응책 마련에 분주하다. 사실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국내 은행권은 기업금융에 집중하면서도 서민을 상대로 한 금융도 활발히 하였다. 당시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등은 원래 서민의 소액 대출과 주거 안정을 위한 국책은행이었고, 일반은행들도 각기 소액 대출 제도를 운용하며 일정 서민금융을 하였다.
1998년 외환위기 직후 국내 은행들은 대거 공적자금 투입과 더불어 사상 초유의 구조조정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외국자본의 국내 금융기관 인수 및 지분 투자가 활발해지고, 생존 본능이 강해지면서 국내 은행들은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국내 은행들은 시장경제의 경영 원칙을 한층 강화하였고, 그 과정에서 자연히 서민금융을 소홀히 하였다. 대신 안정성과 수익성을 겸비한 주택담보대출 등 가계대출을 확대하고, 수익 극대화를 위해 부유층 시장을 전략적으로 집중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더욱 뚜렷해진 금융 양극화 현상 속에서 은행의 저신용 서민 대상 신용대출은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정책당국도 ‘서민’은 금융 측면에서 ‘은행 등 제도금융권 이용이 곤란한 사람’으로 정의할 정도로 은행의 순수 서민금융은 사실상 사라졌다. 현재 은행의 순수 서민금융은 은행권 영업이익의 일정 부분을 자체 재원으로 조달해 중금리로 서민에게 대출해 주는, 2010년 정책적으로 만들어진 ‘새희망홀씨대출’ 정도다.
이번 대통령의 질타 이후 은행마다 상생 기금을 설정해 현재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자영업자·소상공인 등에게 이자 감면 등 여러 지원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물론 은행권 전체적으로 일정 규모의 상생 기금이 효력을 보일 수 있지만 기금이 고갈되거나, 상황이 바뀌면 효과가 중단될 수 있다. 다른 대안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횡재세는 은행권 수익의 상당한 비중을 지속해서 징수하여 지원하자는 것인데 이는 민간 은행의 경영 의지를 가로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장경제 원리에도 맞지 않는다. 더더욱 국내 은행권은 외국자본이 지배하고 있어 자칫 시장에서 돌이킬 수 없는 민감한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애초 문제의 본질은 은행권 수익이 많아서 그 수익 일부를 떼어 서민금융에 쓰자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심화하는 은행권으로부터의 금융 소외 현상을 근본적으로 해소하자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은행마다 개인신용평가시스템(CSS: credit scoring system)을 작동하고는 있지만, 사실상 지금과 같이 신용점수가 일정 수준 이하의 사람을 획일적으로 신용대출에서 배제한다는 것 또한 은행 경영 원칙에 맞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금융의 본질은 저신용·저소득자이지만 상환 능력이 있으면 찾아 신용대출을 확대하는 것이다. 외환위기 직후 선진금융기법을 도입한다면서 은행마다 고가로 사들인 CSS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최근 해외에서 적극적인 사후관리로 서민금융이 높은 상환율을 기록하면서 수익성이 확인되자 서민 소액 대출을 자발적으로 취급하는 은행들이 증가하는 추세다. 미국 BoA와 씨티뱅크 등 글로벌 초대형은행들도 그렇다. 국내 은행도 서민이 강해야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구축하고 안정적인 미래수익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전략적 차원에서도 순수 서민금융을 좀 더 확대할 필요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정책당국의 노력도 배가돼야 한다. 국내 은행들이 경영 원칙에 따라 적극적인 서민금융이 어렵게 된 것은 일종의 ‘시장실패’라 할 수 있다. 정책당국은 은행 건전성 평가시스템을 개선하고, 인센티브 제도를 재설계함으로써 시장실패를 보완해야 한다. 만일 은행 스스로 경영 원칙 차원에서 직접 취급하기 어렵다면 저축은행이나 우수 대부업체 등 서민금융 집행기관을 대상으로 온렌딩(on-lending)대출 형식으로 서민금융을 확대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은행권의 비중이 높은 상황에서는 금융권 ‘맏형’인 은행이 자발적으로 서민금융 역할을 증대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