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 대응의 본질은 공조 아닌 경쟁
내년 미니회의 앞서 역량 강화 힘써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의 가짜 동영상이 사회 혼란을 초래한다는 일본발 보도가 어제 나왔다. 기시다 총리가 성적 발언을 하는 것처럼 인공지능(AI) 기술로 조작한 동영상이다. 지난 2일 엑스(X·옛 트위터)에 올라와 하루 만에 조회수 230만 회를 넘겼다. 같은 시점에 유튜브에선 영국 출신의 밴드 비틀스의 마지막 신곡 ‘나우 앤 덴’이 공개됐다. 존 레넌(1940~1980)이 1977년 녹음한 미완성 데모곡의 불량 음질을 AI 기술로 깨끗이 복원한 신곡이다. 공개 첫날 조회수가 400만 회를 가볍게 웃돌았다.
AI를 털북숭이 개라고 치자. 그렇다면 기시다 동영상은 날카로운 송곳니가 있는 앞부분으로, 비틀스 신곡 ‘나우 앤 덴’은 토닥토닥 두들길 엉덩이가 있는 뒷부분으로 구별할 수 있다. 앞뒤 구별이 쉽다. 적절한 대응도 가능하다. 기시다 동영상의 경우 뉴스프로그램 로고를 도용당한 니혼TV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며 정색을 하고 나선 것처럼. 하지만 털이 수북이 자라나 온몸을 뒤덮을 정도가 되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앞뒤 구별부터 어려워지는 것이다.
세계 28개국 대표가 1, 2일 영국 블레츨리 파크에 모여 AI로 초래될 수 있는 재앙적 피해를 막기 위한 국제 협력을 다짐했다. 제1회 ‘AI 안전 정상회의’다. 윤석열 대통령도 화상으로 참여했다. 공동 선언도 나왔다. ‘블레츨리 선언’이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기념비적 합의라고 했다. 털북숭이 개가 앞으로 언젠가 사고를 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첫 정상급 회의였으니 더한 공치사를 해도 무방하다.
영국 정부는 성명을 통해 각국 대표, 빅테크 대표들이 차세대 AI 모델의 안전성을 시험하는 데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했다고 설명했다. AI 위험 파악을 위한 보고서도 발간한다고 했다. 하지만 국제사회가 이번 회의를 계기로 AI 공조의 길로 나아갈 것으로 여기는 것은 오산이고 착각이다. AI 규제 주도권을 겨냥한 탐색전으로 이해하는 것이 사실관계에 가깝다.
지난해 11월 미국 오픈AI의 챗GPT가 선보인 이후 세상은 요동치고 있다. 빅테크 기업을 다수 보유한 미국은 중국 견제 등에 바쁘고 이렇다 할 빅테크 기업이 없는 유럽은 규제에 승부를 걸고 있다. 유럽연합(EU) 입법기구인 유럽의회는 지난 6월 불법 콘텐츠 생성 방지 의무화 등을 담은 규제 초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AI 개발 및 사용’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국이 추월 차선을 탄 셈이다.
미국과 영국이 이번 회의를 앞두고 AI 안전 연구소를 주도하겠다는 선언적 발표를 한 것도 유념할 대목이다. 중국은 국제 규제기관을 통한 규제를 주장한다. 각개약진이다. 이런 회의에서 주판알 튕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귀가 여간 어두운 게 아니다. 선발·후발 업체 간 입씨름도 혼선을 더했다. 일종의 표준 경쟁이 벌어진다는 방증이다.
AI 시류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국제 동향의 허실을 짚는 것은 물론 AI 규제가 실효를 거둘지, 대안은 있는지 밝은 눈으로 살펴야 한다. 국제사회가 가장 쉽게 합의할 규제 대상은 당연히 기시다 동영상 유형을 비롯한 털북숭이 앞부분이 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AI가 법적, 도덕적 한계를 지키게 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기술적 난제가 될 수 있다.
AI 플랫폼에 책임을 묻는 방식이 유효할지도 의문이다. 사용자 오남용 책임을 외면하고 기업만 압박해서 과연 역기능을 막을 수 있겠나. 깡패 국가, 테러 조직, 범죄 집단이 불장난을 벌일 개연성도 없지 않다.
상대성이론으로 20세기 세상을 바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친구네 반려견 모지스의 털이 하도 길어 앞뒤를 분간하기 어렵다는 불평에 “자기가 알면 됐지”라고 촌평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AI의 불가측성 앞에서 이렇게 초연할 수 없다. 한국은 내년 5월 영국과 함께 후속 조치를 중간 점검하는 AI 미니 정상회의를 개최한다. AI 주도권 경쟁에서 앞서갈 호기다. 아마도 AI 위험 반경이 얼마나 넓은지 꿰뚫어 볼 혜안과 통찰력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AI라는 털북숭이의 앞뒤를 알아보고 위험성을 견제할 역량 강화에 젖먹던 힘까지 다 쏟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