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이 얼마나 무더웠는지를 그런 여름을 보낸 기억만이 아니라 나무와 열매의 모습으로도 알 수 있었습니다. 제 고향 강릉은 바다를 낀 해양도시이면서도 지난 8월 연일 40도를 웃도는 무더위에 시달렸습니다.
사람만 시달린 게 아니었습니다. 움직이지 못하고 한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 더위를 견뎌야 하는 나무들의 시달림도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그늘을 만들어낼 줄 알아도 그 그늘 속에 들어갈 수 없는 게 바로 나무지요. 아무리 더워도 비명을 지르지 못하는 대신 더위의 흔적을 열매에 남깁니다.
추석에 고향에 내려갔더니 예전에 할아버지가 심은 밤나무 아래 밤이 많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밤알도 많이 떨어져 있지만, 밤송이째 뚝뚝 떨어져 있는 밤도 많았습니다. 예전에는 밤송이째 떨어져도 발로 툭툭 건드리면 밤송이 안에서 밤알이 저절로 튀어나왔는데 올해는 달랐습니다. 떨어진 밤송이 안에 밤은 발갛게 익었어도 밤송이가 쉽게 벗겨지지 않아서 막대를 이용해서 깠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이번 여름 폭염에 밤송이의 뾰족한 가시는 타들어 가고, 밤을 감싸고 있는 밤송이는 마치 찜기에 쪄지듯 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식물이 가뭄을 타는 건 잘 알았어도 더위를 타는 건 올해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도 밤나무 산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가엔 구절초가 아름답게 피어 있었습니다. 도시의 꽃밭에 옮겨심은 구절초는 거의 흰색인데 야생 구절초는 은은한 분홍색과 보라색을 띠어 더욱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우리가 통틀어 참나무라고 부르는 도토리나무에 여러 종류가 있듯 들국화 역시 어느 한 종류의 꽃이 아니라 구절초와 벌개미취와 쑥부쟁이를 합쳐 들국화라고 부릅니다.
이제는 산 과일을 일부러 가서 따거나 줍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호두를 닮았지만 동그스름한 호두보다 뾰족한 가래 열매도 떨어진 채로 그냥 있습니다. 야생 다래도 따가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예전에 아버지와 함께 아침 일찍 산을 한 바퀴 돌며 따오면 송이도 그 산의 소나무가 튼튼하게 자라며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송이는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며 자라는 버섯이어서 소나무가 재목감으로 튼튼하게 자라면 흔적을 감춥니다. 송이가 산을 옮겨간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성묘의 아름다움은 격식과 예법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조상님 산소에 가서 들려주는 조상님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물을 차리고, 절하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어느 분이 이 산 전체를 밤나무산으로 만들었는지, 그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는지, 그 혜택으로 공부하신 분들은 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이야기하면 조상님과 내가, 또 조상님과 아이들이 멀리 있는 게 아닌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민둥산에 밤 다섯 말을 심어 밤나무 산으로 바꾸어놓은 할아버지께서 우리 어릴 때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가을 과일 중 가장 못생긴 모과는 멍석에 잠시 놓아두어도 자신이 있던 자리에 향기를 남긴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지요. 저는 그 말씀이 할아버지가 저에게 남겨주신 가을향기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