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걷는 것도 두려워요”…‘묻지마 범죄’ 반복되는 이유는 [이슈크래커]

입력 2023-08-04 16:03 수정 2023-08-2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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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1일 서울 관악구 신림역 인근에서 불특정 다수를 노린 반(反) 사회적 범행이 발생한 지 약 2주 만에 또 다시 ‘묻지마 흉기’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서울 관악구 신림역에서 일어난 칼부림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3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에서 이른바 ‘묻지마 흉기난동’ 사건이 또 다시 일어났는데요.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4일 서울 서초구 고속버스터미널 경부선 건물 1층 상가에서 흉기 소지자가 검거됐고 대전에서는 대덕구 고등학교서 칼부림으로 교사가 피습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습니다.

시민 왕래가 많은 곳에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무차별적 범행이라는 점에서 모방 범죄 가능성이 제기되는 상황 속 비슷한 범행을 저지르겠다는 예고 글이 전국에서 잇따르고 있는데요. 경찰에 따르면 전날 오후 6시 이후 서울시내를 범행장소로 지목한 ‘살인예고’ 글이 모두 12건 올라왔습니다. 경찰청이 전담대응팀을 꾸려 살인예고 글 작성자를 엄중 처벌하겠다고 밝힌 지 하루 만에 전국에서 최소 15건의 협박 글이 게시된 것입니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무차별적 범죄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시민들은 연이은 범죄 사건에 “길 걷는 것도 두렵다”며 피해 당시 영상과 사진을 공유하며 불안감을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계획범죄 정황과 과거 전과 기록이 드러나며 흉악범죄 사전예방 시스템 마련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정작 법무부와 검찰은 묻지마 범죄 예방을 위한 뚜렷한 대책은 없어보입니다.

결국 잔혹한 사건 사고가 이어지자 ‘사형제 부활’ 가능성까지 언급되고 있는 상황인데요. 전문가들은 사건의 원인을 면밀히 분석한 뒤 묻지마범죄에 대한 개념 정립과 관련 사례 분석을 통해 맞춤형 대책을 세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3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인근 백화점에서 발생한 묻지마 흉기 난동 사건에 앞서 용의자가 경차를 몰고 인도로 돌진해 보행자들을 들이받는 사고를 내 4명이 부상한 것으로도 확인됐다. 사진은 용의자가 이용한 차량. 연합뉴스
▲3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인근 백화점에서 발생한 묻지마 흉기 난동 사건에 앞서 용의자가 경차를 몰고 인도로 돌진해 보행자들을 들이받는 사고를 내 4명이 부상한 것으로도 확인됐다. 사진은 용의자가 이용한 차량. 연합뉴스
‘살인예고’ 하루새 20여 건 쏟아 져…“늘 다니던 곳도 겁나”

3일 오후 5시 55분께 서현역 인근에서 ‘불상의 남성이 사람들을 마구 찌르고 다닌다’는 112 신고가 잇따랐습니다.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오후 6시 5분께 피의자인 배달업 종사자 최모(24)씨를 범행 현장 근처에서 현행범으로 체포했습니다.

최씨는 경차를 몰고 인도로 돌진해 행인들을 연달아 치었고 이후 사고 충격으로 차량이 멈추자 서현역과 이어진 대형백화점 AK플라자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AK플라자 1, 2층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흉기를 휘둘렀고 이로 인해 1명이 다쳤습니다.

조선(33)이 지난달 21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대낮에 흉기 난동을 벌여 1명을 살해하고 3명을 다치게 한 사건이 발생한 지 13일 만의 일인데요. 이번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은 신림역 사건을 모방한 범죄일 가능성이 크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서현역 난동은 조선의 범행과 여러 면에서 비슷한데요. 조선과 최씨 모두 유동 인구가 많은 지하철역 인근을 범행 장소로 골랐고 각각 오후 2시와 6시 비교적 유동 인구가 많았을 때를 범행 시간대로 고른 점, 일면식 없는 타인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 역시 유사합니다.

피해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속수무책으로 변을 당했고 백화점 이용객들과 행인들은 극심한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배달업에 종사하는 최씨는 체포된 뒤 피해망상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범행 동기는 현재 경찰이 조사 중인 만큼 예단할 수는 없지만 조선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은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범행에 나섰다고 진술했지만 최씨는 ‘누군가 나를 청부살인하려 한다’ 등의 피해망상적 사고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최씨가 조선의 사건에 자극을 받았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약2주만에 비슷한 사건이 발생한 만큼 추가 범죄 가능성을 염두에 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신림동 흉기난동 사건 이후 4일 서울경찰청과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서울 시내를 범행 장소로 지목한 유사 ‘살인 예고’ 게시글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게시글에는 이미 범죄가 발생한 서현역부터 잠실역, 강남역, 한티역 등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이 적혀 있는데요. 시민들은 일상 생활에서 자주 다니던 곳에서 범죄가 발생하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전문가들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살인 예고글 작성자에게 살인예비죄를 적용해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형법 제255조에 해당하는 살인 예비죄는 제250조(살인·존속살해)와 제253조(위계 등에 의한 촉탁살인 등)의 죄를 범할 목적으로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당분간은 모든 살인 예고글 작성자에 대해 살인예비죄를 그냥 적용하는 거, 아주 엄격하게 형법을 적용하는 게 지금 필요한 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살인예비죄는 참고로 10년 이하의 징역으로 엄벌할 수 있다”면서 “구체적으로 흉기 사진도 올리고 이런 것은 사실상 살인을 예비하는 것인데 게시판 글을 내팽개쳐 놓는 것은 상당히 위험을 방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어떠한 행위로 사회의 혼란과 혼동을 야기하고 비난가능성이 높은 행위를 테러라고 규정한다. 현재는 테러단체 가입시에만 처벌하도록 돼 있는데 살인예고 글 등도 테러예비행위로 규정해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4일 오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주변에 경찰이 배치돼 있다. 연합뉴스
▲4일 오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주변에 경찰이 배치돼 있다. 연합뉴스
분류조차 어려운 묻지마 범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뚜렷한 이유 없이 불특정 다수를 겨냥하는 범죄가 빈발하자 20대 또래 여성을 살해한 정유정 사건, 귀갓길 여성을 이유 없이 폭행한 ‘부산 돌려차기’ 사건 등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충격과 불안감이 커진 상황인데요. ‘묻지마 범죄’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이러한 범죄가 일어나는 원인을 살펴봐야 하지만 정작 경찰·검찰 등 수사당국에서는 관련 통계, 사례를 관리하는 기준조차 없어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발적 동기에 의한 범죄가 매년 증가하는 상황 속 ‘묻지마 범죄’는 상해·살해 등 중범죄 비율이 80%를 넘고 재범 비율도 75%에 이릅니다. 즉 우리 사회가 어느 순간부터 분노사회로 바뀌게 된, 즉 알게 모르게 범죄가 뿌리내렸고 신림동 사건이 촉발제가 되었지만 정부의 대응, 형사사법기관의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전 예방 시스템은 물론 구체적인 통계나 대책조차 전무한 현실인 것인데요.

그간 언론에서는 범행동기가 명확하지 않거나 범행에 필연적인 이유가 없는 등 불특정성이 두드러진 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뭉뚱그려 부르면서 원인 분석이나 대책 마련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인데요. 전문가들은 묻지마범죄에 대한 개념 정립과 관련 사례 분석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지난해 1월 ‘묻지마 범죄’의 공식용어를 ‘이상동기 범죄’로 정하고 체계적인 사례 분석과 대응책 마련 등을 위해 태스크포스(TF)를 꾸렸지만 1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척된 상황은 없어보입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국회에서 신림동 흉기난동 사건을 두고 단순한 묻지마 범죄가 아닌 사회적 분노로 시민들에게 무차별 테러를 가하는 ‘외로운 늑대’라고 단정하며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검찰도 관련 통계조차 없는 것은 마찬가지인데요.

학계의 상황도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묻지마 범죄’는 학술적 용어가 아닌데요. 전문가들은 경찰이 ‘묻지마 범죄’라고 밝히고 선행 연구들을 살펴봤지만 어떤 범죄를 ‘묻지마 범죄’라고 부를지 학술적 개념 역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실정입니다. 학계에서는 2010년 전후로 다른 학술 용어를 도입하고자 하는 시도를 해왔지만 통일된 용어는 아직 없습니다. 점차 ‘묻지마 범죄’라는 용어는 학계에서 사라져가는 추세지만 학자마다 ‘무동기범죄’‘무차별점죄’ 등으로 달리 부르기도 하는 등 기준도 각양각색입니다.

이를 두고 이웅혁 교수는 “묻지마 범죄는 개인의 사이코패스적 성향 등에 따른 개인의 돌발행동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사회적 위험 신호인 걸로 봐야 한다. 묻지마 범죄를 저지를 잠재성이 있는 전과자 등에 대한 관리 및 예방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형사사법 시스템에 대한 전수조사가 필요하다”고 언급했습니다.

▲이만희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민의힘 간사가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묻지마 범죄 관련 대책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
▲이만희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민의힘 간사가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묻지마 범죄 관련 대책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
사형제 부활할까, 당정 ‘가석방 없는 종신형’ 추진

일면식도 없는 이들을 향한 흉악범죄가 기승을 부리자 26년간 사형 집행이 없었던 우리나라에서도 사형 집행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하고 있습니다. 약한 처벌이 범죄를 부추기고 있다는 판단에서인데요. 당정은 ‘묻지마 흉기난동’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가석방 없는 종신형 도입 논의를 본격화했습니다.

법무부는 가석방을 허용하지 않는 무기형을 형법 조문에 신설하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가석방 없는 종신형’은 말 그대로 수형자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무기한으로 교도소에 가두는 형벌을 일컫습니다. 현재 우리 형법상 무기징역을 선고받더라도 가석방이 가능한데요. 형법에 따르면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은 사람이 행상(行狀)이 양호해 뉘우침이 뚜렷한 때에는 무기형은 20년, 유기형은 형의 3분의 1이 지난 뒤 가석방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1997년 이후 사형을 집행한 적이 없고 법원도 2016년을 마지막으로 사형 선고를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또 현행법에는 절대적 종신형에 대한 법 규정이 없어 사형은 가석방 없는 무기형의 일환으로 취급돼 왔습니다. 앞서 국회에서도 사형제를 폐지하고 절대적 종신형으로 대체하자는 내용의 ‘사형제 폐지에 관한 특별법안’을 여러 차례 발의했지만 모두 계류 중인데요.

한 장관은 지난달 26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괴물의 경우 영원히 격리하는 방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기본권 제한도 충분히 고려하면서 방어적으로 여러 대책을 마련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며 제도 도입에 긍정적인 의사를 밝힌 바 있습니다.

당정은 이날 회의에서 경찰의 치안 업무 강화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국민의힘은 경찰에 ‘순찰’ 방식이 아닌 유동 인구가 많은 강남역, 신림역 등 지역에서 경찰 인력이 상시 근무하도록 하는 ‘거점 배치’ 방식 도입을 제안했는데요. 국민의힘은 이를 위한 유동 인구 분석 등을 정부에 주문했고 분석이 끝나는 대로 거점지역 선정 등을 논의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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