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그룹은 그 후 외환위기를 이겨내고 대한생명(현 한화생명)을 인수해 금융을 새로운 성장분야로 추가한 데 이어 삼성에서 방산 부문을 대거 인수해 몸집을 불렸다. 20년 전 김승연 회장의 결기는 빈말이 아니었다. 또 글로벌 경제위기로 눈물을 머금고 손을 뗐던 대우조선에 다시 도전해 마침내 한화그룹의 품으로 가져왔다. 15년 만의 재도전은 그의 장남 김동관 부회장이 주도해 마침표를 찍었다. 한국 재계에 백안시됐던 인수합병(M&A)을 성장동력으로 삼아 기업을 키워온 아버지의 전략을 장남이 이어받은 셈이 됐다.
지금의 김동관 부회장과 비슷한 연배였던 취임 초의 김승연 부회장은 오너십을 새롭게 정의한다 할 정도로 진취적인 경영전략을 구사했다. 그의 취임 당시인 1980년 7000억 원대였던 그룹의 매출이 1984년에는 2조 원을 넘겼는데 그중 절반이 그의 결단으로 인수한 한양화학과 다우케미컬에서 나왔다. 당시 김 회장은 미국 측의 일방적인 인수 조건에 의표를 찌르는 파격적인 승부수를 던졌다. 가로 30cm, 세로 1m가 넘는 긴 한지에 먹글씨로 장문의 편지를 다우 측에 보냈다. 물론 영어는 없었다. 사업은 신의와 성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다우 측 태도가 확연히 달라져 인수가 결정됐다. 상대의 꼼수에 그는 원칙으로 승부했고 그때 구사했던 원칙과 의리는 그를 상징하는 단어가 돼버렸다.
종업원과의 관계에서도 그의 오너십은 탁월한 빛을 발했다. 생산직 현장사원을 임원으로 발탁하고 30년이 넘게 일하다가 타계한 말단사원을 회장이 직접 조문하기도 했다. 큰 수술을 받은 그룹의 홍보실장을 연수원으로 발령내 부담없이 일하게 했고 그의 사후 가족 장래까지 약속한 뒷얘기가 나오면서 한때 재계 홍보실에서는 저런 회장과 일하고 싶다는 부러움까지 퍼지기도 했다. 선대 회장을 지근에서 보좌하던 간판급 전문경영인들을 내치지 않고 계속 중용하며 충고 한마디가 아쉬웠던 젊은 시절의 외로움을 달래기도 했다.
새로이 인수한 대우조선의 사명을 ‘한화오션’으로 정한 것도 한화 특유의 저돌적인 기업문화가 작용한 듯하다. 대형 M&A 이후 회사의 사명은 대체로 업계 내의 위상과 명성을 고려해 지어지게 된다. 외환 업무가 약했던 하나은행이 외환은행(KEB)을 인수하고도 한참동안 ‘KEB하나은행’으로 나갔던 것이나 반도체 사업에 새로 뛰어든 SK그룹이 하이닉스를 인수하고 ‘SK하이닉스’를 사명으로 정한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무역이 없었던 포스코는 대우인터내셔널을 인수하고도 사명을 한동안 그대로 유지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주인 없던 23년간의 방만했던 기업문화를 일거에 쇄신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한화다운 자신감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사명 변경과 함께 조선소의 상징으로 꼽히는 골리앗 크레인에도 ‘DSME 대우조선해양’ 대신 ‘Hanwha(한화)’가 새겨질 예정이다.
우려와 기대가 교차했던 초기의 10년을 김승연 회장은 원칙이 작동하는 기업문화의 창조에 매진했다. 의리가 그의 마스코트가 될 정도로 종업원과의 유대도 강화됐다. 원칙과 의리를 바탕으로 한 그의 오너십은 회사를 거침없이 키워냈다. 기존의 우주와 육상 부문에 새로이 해양이 추가돼 육해공 통합 사업시스템을 가지게 된 한화그룹의 향후 성장세에도 이런 오너십은 계속 유효할 것이다. 그리고 마취없이 수술대에 오를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지난날 구조조정의 경험도 새로운 출발점에 선 한화그룹의 앞날에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