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인 대표의 지분은 회사가 투자받을 때마다 계속 희석된다. 회사를 설립할 때 대표 100% 지분으로 시작했어도 시리즈 C, D쯤 되면 지분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창업주의 지분이 30% 이하로 희석되거나 최대 주주가 아니게 되면 이제 절차를 거쳐 복수의결권이 있는 주식을 발행할 수 있다. 창업주가 경영권 위협 없이 안정적으로 회사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문제는 복수의결권 실효성에 의문을 가진 시각이 많다는 점이다. 스타트업을 창업했거나 임원으로 재직해 봤다면, 스타트업 거버넌스는 창업주가 보유한 지분과 무관하게 창업주와 투자자가 맺은 주주 간 계약서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시리즈 A 투자를 받은 창업주는 보통 50% 이상의 의결권을 가지고 있어 상법에 따라서는 경영 사항 대부분을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주주 간 계약서에 의해 투자자가 동의해야 임원의 선임, 투자 유치, 스톡옵션 부여 등 주요 경영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투자자가 소수 지분일 때도 중요 의사결정에 대한 거부권이 있는 셈인데, 복수의결권 제도가 도입된다고 해서 크게 변화가 있겠느냐는 의심의 시선이 많다.
물론 벤처 투자를 활성화하려면 창업자보다 지분이 적은 투자자를 보호할 방법도 필요하다. 투자 계약은 사적 자치의 영역인 만큼 어느 한쪽을 약자나 강자로 규정하고 과도하게 계약 내용을 제한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동반매수청구권, 우선매수권, 주식매수청구권 등 각종 투자자 보호 장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모든 경영사항에 대해 사전동의권까지 추가로 요구하는 현재의 투자 계약 관행은 창업자의 권리와 자율성을 과하게 침해하는 면이 있다고 본다.
투자자 수가 늘어날수록 사전동의권이 투자자 스스로에게도 독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창업자와 다수의 투자자가 IPO를 진행하고자 하는 상황에서, 마지막에 투자한 투자자가 기업 가치가 낮다는 이유로 IPO에 반대하면 창업자가 소송을 각오하고 IPO를 강행하기는 어렵다.
사전동의권 조항이 스타트업 업계의 오랜 관행으로 남아 있으면서 스타트업 거버넌스 방식은 활발히 논의되지 못했다. 한 번이라도 투자받았다면 모든 중요 경영 사항에 대해 사전 동의를 받아야 하니 창업자의 지분이나 의결권이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투자자가 무한대의 의결권을 행사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지금 지분이 중요한 순간은 상장 심사 정도인데, 한국거래소는 대표 지분이 많아야 지배구조가 안정돼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상장 심사의 중요 요건으로 보고 있다. 이번에 도입된 벤처기업의 복수의결권 제도는 창업자의 지분이 낮아 상장 심사에 어려움을 겪는 회사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 외 스타트업 거버넌스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에는 부족하다.
2021년 9월 고등법원은 ‘주주 간 계약을 했더라도 사전동의권은 주주 평등 원칙에 반해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어져 온 투자 관행에 제동이 걸리나 싶었지만 아직은 사전동의권을 중심으로 한 스타트업 거버넌스에 큰 변화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기는 하지만, 주주 평등이라는 상법의 대원칙에 비춰봤을 때 앞으로 투자자의 사전동의권은 무효가 되거나 영향력이 약해질 가능성이 크다. 스타트업 생태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창업자와 투자자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균형 있는 거버넌스 모델이 필요하다. 사전동의권이 아니더라도 투자자가 이사 임명권 등을 이용해 이사회에 참여하는 등 투자자의 권익을 보호하면서 회사의 성장에도 기여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창업자를 위한 복수의결권이 도입되는 시점인 만큼, 벤처 생태계의 장기적 발전에 도움이 되는 거버넌스 모델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