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필자가 살고 있는 곳에도 10분 거리에 파리바게뜨와 뚜레쥬르가 있고 H마트(Mart)도 있다. 그런 곳을 보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속으로 가게 이름을 지우고 새로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파리바게뜨나 뚜레쥬르는 불어고, 한아름에서 H마트로 바뀐 한국 식료품점은 영어 알파벳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으니 우리 것을 알릴 좋은 기회인데, 굳이 한국이란 국적을 지워버리고 서양화하거나 국적불명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다가가기 위해서? 하지만 에르메스나 샤넬은 불어 그대로 고급명품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말이다. 여기서 세계가 우리를 알고 싶어하지만 스스로를 온전히 아끼고 가꾸고 사랑하는 데 인색한 우리의 모순을 발견한다. 어쩌면 이는 한류가 세계로 퍼져나감에도 선진국 지향에 물들어있는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는 듯하고, 더 나아가 자주성이 준 듯한 정치·외교적 성향과도 겹쳐지게 한다.
아무리 국력과 경제규모가 차이 나는 국가를 상대한다고 해도, 국민들은 위정자들이 주권국가의 자긍심을 지키며 국익을 극대화하기를 기대한다. 그동안 보수든 진보든 과거 대부분의 정부는 미·중·일·러 등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열강의 역학관계를 실리에 따라 이용해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전략적 모호성을 깨고 북·중·러와 멀어지고 미·일에 밀착하면서, 주체적인 목소리보다는 타국의 입장에 발맞추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장 크게는 피해자의 존엄성 회복과는 거리가 멀게 일본의 국익에 최적화된 강제동원 배상 해법을 내놨다는 것이다. 또 최근 미국 정보기관에서 우리 대통령실 내 국가안보실을 도청한 문제에 대해서도 아무런 공식적 문제 제기 없이 넘어가고자 하는 것 같다. 문서를 유출한 당사자가 체포되었는데도 미국의 악의는 없었다거나 문서 내용이 허위일 수 있다고 하는데, 만약에 우리가 백악관을 도청했어도 미국이 오히려 우리를 두둔하는 입장을 보였을까 싶다. 또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이나 대만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미국 입장을 대변하다시피 하는 모습이 과연 경제, 외교, 안보 문제가 복잡히 얽혀있는 우리의 국익에 최선인지, 협상을 위한 패를 미리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대가로 얻는 것은 이미 공고한 한미동맹을 더욱 더 공고히 하는 것인가? 국민들에게 형식적인 이유든 숨은 이유든 사정을 보다 투명하게 공개하고 이해를 구할 수는 없을까?
우리 역사에서 이렇게 강대국에 의존적인 태도는 언제부터였는가. 만주벌판을 누리던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삼국통일을 했을 때, 고려가 몽골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종속되었을 때,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고 조선을 건립하였을 때 심화되었을까. 하지만 이러한 태도가 패배와 무기력이 학습된 결과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는 수나라의 30만 대군과 당태종이 이끌고 온 100만 대군을 물리쳤던 고구려,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신라,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을 물리친 조선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사대주의는 어떤 면에서는 지배층이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활용하기도 했다. 인조반정의 중심세력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내세울 때 명나라를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이는 결국 부국강병보다 정권을 잡은 세력이 그들만의 이익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또한 자국민을 위해 최선의 결정을 내리기보다 타국가가 그들의 이해에 따라 한 행동을 은혜로 생각하며 그에 발맞추는 비정상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사고는 결국 실리에 따른 자주적 선택보다는 우리 것은 열등하며 큰 나라의 ‘선진’문명을 따라야 한다는 방향으로 내면화될 수 있다. 즉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면서도 일본이 근대화시켜준 은혜국이라는 뉴라이트 사관으로, 미국이 우리나라를 경제안보적으로 제어하는 현실은 공산정권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는 순응과 절대적 맹신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뜻 모를 알파펫 축약형으로 바꿔 한국적 정체성이 없는 기업명과 브랜드, 번역을 아예 포기한 영화 제목, 난해한 아파트 이름, 공공기관이나 언론이 오히려 외래어 사용을 조장하고 있는 현실은 모습을 달리해서 나타나는 종속적 가치관을 보여준다. 개인이 자존감 없이는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없는 것처럼 국가도 스스로를 존중하고 아끼지 못한다면 고유한 공동체를 이루는 존립가치가 흔들릴 것이다. 따라서 국민에게 권력을 위임받은 위정자의 책무는 국제적으로 보편적인 가치의 틀 안에서, 타국과 대등한 관계 속에서 국익을 도모하기 위한 온전한 목소리를 내는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