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지하철 등 공공장소에서 헤어롤을 장착하고 있는 젊은 여성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외신에는공공장소에서 헤어롤을 장착한 대한민국 젊은 여성을 주요 이슈 종종 다루기도 합니다.
여성의 헤어롤 착용을 남성이 만들어놓은 세상에 대한 반항의 상징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요. 이탈리아 유력 언론매체는 여성의 헤어롤 착용을 갈수록 심각해지는 한국의 저출산 문제와 연관 짓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는 2일(현지시간) ‘한국의 엄마들이 파업한다: 동아시아 호랑이의 멸종 위기’라는 제목의 국제면 기사를 통해 한국의 저출산 현상과 원인을 살폈는데요. 기사를 작성한 미켈라 만토반 기자는 2021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 수)이 0.81명으로 세계 최하위 수준이었다며 “한국에서 신생아들이 태어나지 않고 있다. 작지만 강력한 아시아의 호랑이가 인구 감소 묵시록의 한가운데에 있다”고 짚었습니다.
한국이 저출산의 늪에 빠진 근본 원인으로는 한국 사회의 남녀 불평등과 직업 환경에서의 차별을 꼽았는데요. 이러한 모순을 첨예하게 경험한 여성들이 의도적으로 출산을 기피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만토반 기자는 이를 ‘출산 파업’으로 규정했습니다.
도대체 ‘헤어롤’은 한국 여성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헤어롤은 머리카락에 풍성한 느낌을 주는 미용 도구입니다. 가격도 저렴하고, 머리카락을 말아놓기만 하면 돼 간편하다는 장점이 있어 외출 전 쉽게 사용하곤 했죠.
그러나 요즘엔 길거리, 대중교통, 학교나 도서관 등 다수의 인파가 모이는 장소에서 헤어롤을 착용한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앞머리 볼륨을 위해 사용하는 모습인데요. 헤어롤은 어쩐지 하나의 패션처럼 자리 잡은 듯합니다.
집 밖에서의 헤어롤 착용이 대중화된 시점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2015년 그룹 EXID 멤버 하니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헤어롤을 말고 잠을 자는 장면이 화제가 되면서 헤어롤 착용이 보편화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후로도 하니는 헤어롤을 만 모습을 SNS 등을 통해 수차례 공개했습니다. 한때 헤어롤은 하니의 트레이드마크로 여겨지기도 했죠.
한 일본 방송에서는 젊은 한국 여성들이 헤어롤을 갖고 다니며 밖에서도 자유롭게 사용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소개했는데요. 이 사실을 접한 방송인들이 놀라는 모습도 담겼습니다. 이후 한국 온라인 커뮤니티에 해당 방송 내용을 전하는 글이 게재됐는데, 여기엔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렸습니다. 밖에서 헤어롤을 착용한다는 것을 두고 “품위 없어 보인다. 잠옷 입고 돌아다니는 것과 똑같다”는 지적과 “피해 주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냐”고 반박하는 의견이 충돌한 겁니다.
집 밖에서의 헤어롤 착용은 종종 논쟁거리로 불거지곤 합니다. 온라인 커뮤니티 등지에서는 ‘헤어롤을 밖에서 하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묻는 글들이 꾸준히 올라오죠. 의견은 갈리지만, 대다수가 “회의 같은 중요한 자리에서는 착용하면 안 된다”는 지적엔 공감하는 모습입니다.
함돈균 문학평론가는 저서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에서 “요즘 사람들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구루프(헤어롤)를 달고 다니는 현상은 억압에 대한 발랄한 도전이자 뻔뻔함의 현상학’”이라며 “예전에는 남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던 이런 모습이 유행처럼 돼 버린 것은 10년 전 유행한 팬티가 보이도록 느슨하게 걸쳐 입는 힙합 바지나 브래지어 끈 노출 패션과 유사하다”고 봤습니다.
이번 이탈리아 언론 보도에 앞서 뉴욕타임스(NYT)도 ‘헤어롤 현상’을 다룬 바 있는데요. NYT는 2021년 ‘공공장소에서의 헤어롤? 그들이 머리하는 방식일 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고 서울 카페를 비롯해 식당, 대중교통, 거리 등 어디에서나 앞머리에 헤어롤을 하고 다니는 젊은 여성들을 볼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매체는 헤어롤 유행을 꾸밈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와 세대 차이를 보이는 사회적·문화적 현상으로 분석했습니다. “(밖에서) 헤어롤을 착용하는 젊은 여성들은 이것이 기능적일 뿐만 아니라 성별과 아름다움에 관한 생각이 변화하고 있다는 징후이자 세대 차이의 상징이라고 말한다”고 강조했죠.
대학생 정 모(23) 씨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길에서 지나치는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모습과 내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학생은 헤어롤을 밖에서 하고 다니지 말라고 어머니에게 제지당한 사연도 소개하며 “과거에는 꾸미는 과정이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지만, 우리 세대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다들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헤어롤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NYT는 정 씨의 이러한 생각을 ‘독립적’이라고 평가하면서 “이 같은 생각의 확산은 과거 한국 사회에서 엄격하게 지켜졌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젊은 층 사이에서 퍼지고 있다”며 “오늘날 젊은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보다 신경 쓰지 않는다”고 부연했죠.
미국 경제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도 지난해 2월 한국에서의 ‘앞머리 헤어롤 외출’을 언급하며 “완벽한 외모를 중시했던 시대에서 벗어나 인식 변화가 일고 있다”는 분석 기사를 내놨습니다. 매체는 사회행동학 전문가의 말을 빌려 “한국 사회는 이제 아름다움에 대한 집단 규범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 개성과 다양한 스타일이 자리 잡는 기반이 될 수 있는 좋은 소식”이라고 평했죠.
헤어롤 패션이 오히려 박수받은 사례도 있습니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선고일 당시 이정미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헤어롤 두 개를 달고 출근한 모습이 포착되면서 화제를 빚은 바 있는데요. 이날 이 권한대행은 재판 준비를 위해 출근 시간을 1시간가량 앞당겼습니다. 선고에 집중한 나머지 시간을 아끼고자 말아놓은 헤어롤조차 잊은 이 권한대행의 모습엔 호평이 나왔죠. 당시 AP통신 등 외신은 “여성 재판관이 자기 일에 헌신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고 보도했습니다. 코리에레 델라 세라도 이번 기사에 이 권한대행이 헤어롤을 머리에 달고 출근하는 사진을 실었습니다.
이 매체는 지난해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언급하면서 “해당 드라마는 인력 감축이 있을 때 회사가 여성을 압박해 사직서를 쓰게 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담았다”며 “한국 여성들은 그동안 유교 문화로 인해 억압받았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낮은 출산율을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은 성평등”이라며 “한국은 성평등이 실현돼야 소멸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죠. 코리에레 델라 세라는 이탈리아 밀라노에 기반을 둔 일간지로, 이탈리아에서 발행 부수가 가장 많기도 합니다.
당장 길거리에서 숱하게 볼 수 있는 헤어롤을 ‘남성이 만들어놓은 세상에 대한 반항의 상징’이라고 분석한 외신의 목소리는 흥미로운데요. 헤어롤 유행이 불거진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사적 영역이 대중화된 현상을 다소 불편하게 여기는 시각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온라인상에서는 이에 대한 갑론을박도 꾸준히 벌어지죠. 집 밖에서의 헤어롤 착용을 ‘옳다’ 혹은 ‘그르다’로 정의할 순 없지만, ‘여성이라면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완벽하게 외모를 단장하고 외출해야 한다’는 통념이 옛말이 된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