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 가운데, 더불어민주당은 다른 쟁점 법안인 간호법, 방송법 등의 강행 처리도 시도하고 있다. 이들 법안 역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커 내년 총선까지 대통령실·여당과 거대 야당의 '강 대 강' 대립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2일 정치권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이르면 4일 개최되는 국무회의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 절차를 밟을 것으로 예상된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쌀 초과 생산량이 3~5%이거나 수확기 쌀값이 전년 대비 5~8% 하락할 때, 정부가 초과 생산량을 의무로 전량 매입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그동안 정부·여당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시장의 수급조절 기능을 마비시키고, 막대한 재정부담을 야기한다는 이유로 반대해왔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쌀값 안정화를 명목으로 개정안을 강력히 추진했으며, 지난달 23일 결국 국회 본회의를 통과시켰다.
이후 지난달 29일 당정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공식 건의함에 따라 윤 대통령의 재의요구권 행사가 사실상 기정사실화됐다.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은 국회가 의결해 보낸 법률안에 이의가 있을 때 대통령이 해당 법률안을 국회로 돌려보내 재의를 요구할 수 있는 헌법상 권리다. 본회의에 상정된 재의요구안은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의결된다. 다만, 현재 여당이 3분의 1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어 법안은 사실상 폐기될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으로 예측되자 민주당은 강경 투쟁을 예고했다. 민주당은 3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에서 긴급 현안질의를 한 뒤 국회에서 규탄대회를 열 예정이다. 특히, 규탄대회에서는 당내 쌀값 정상화 태스크포스(TF) 팀장을 맡고 있는 신정훈 의원이 삭발식에 나선다. 신 의원은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쌀에 대한 종합적인 대안들을 다시 낼 것"이라며 법안 재발의를 예고한 바 있어 양곡관리법과 관련한 여야 갈등이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양곡관리법 외에도 야당이 본회의 직회부 등 의석수를 앞세워 입법을 추진 중인 법안이 대기하고 있다. 현행 의료법 등에 포함된 간호사 업무 관련 규정을 별도 법률로 분리하는 내용의 간호법 제정안과 금고 이상의 형을 확정받은 의사의 면허를 박탈하는 '의료법 개정안' 등은 이미 지난달 23일 여당의 반대에도 본회의에 부의됐지만, 김진표 국회의장의 중재로 이달까지 논의를 이어가기로 했다.
앞서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에서도 KBS·EBS 이사회와 MBC 관리·감독 기구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를 개편해 이사회 구성에 정치권 입김을 축소하는 내용을 담은 '방송법 개정안'이 야당의 주도로 21일 본회의에 직회부됐다. 이른바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도 현재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돼 있지만, 민주당 주도로 본회의에 올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현재 예결위원회를 제외한 전체 상임위 17곳 중 6곳에서 민주당 주도로 직회부가 가능해 이같은 야당 주도의 본회의 직회부가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거부권 행사는 윤 대통령에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대통령 거부권은 2016년 5월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 상임위의 '상시 청문회' 개최를 골자로 한 국회법 개정안에 행사한 것을 마지막으로 7년 가까이 사용되지 않았다. 대통령의 거부권은 헌법에 따라 부여된 국회 견제 수단이지만, 민주당이 올리는 법안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협치'가 실종됐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다만, 민주당이 입법 과정마다 단독 처리를 강행하는 것도 '협치'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있다. 신율 명지대 정치학과 교수는 "국회는 합의제로 운영돼야 하는 곳이지 다수제로 운영되면 안 된다"며 "민주당이 국회를 다수제로 운영하지 않고 합의제로 운영했더라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오히려 그걸 빌미로 국회 입법권을 무시한다고 공격할 텐데, 야당에 불리할 것은 없다"고 설명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야당은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줄 알면서도 통과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여당은 대통령 눈치를 보고 무조건 반대하거나 협상을 하지 않으면서 대화와 협치가 완전히 실종돼버렸다"이라며 "협치와 상생이 없는 극한 대치의 우리 정치의 자화상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밝혔다.
박 평론가는 "야당은 윤석열 정부나 여당의 대안 정당이 돼야 하고, 과반 정당이기 때문에 여당이 반대하더라도 야당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며 "총선을 앞두고 국회 다수당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국민의힘이 반대하든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든 그와 무관하게 야당의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다만 법률안이 진짜 국민의 의견을 대변하느냐는 별도의 문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