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우스(제레미 아이언스)는 고등학교에서 고전문헌학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새로울 게 없이 항상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이다. 퇴근하면 혼자서 상대편 자리를 옮겨가며 체스를 둘 정도로 외롭다. 어느 날 아침, 폭우가 쏟아지는 창가를 바라보던 그는 한 여인이 다리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그녀를 구한다.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말도 하지 않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녀가 남긴 것은 붉은 코트와 책 한 권, 그리고 곧 떠날 리스본행 열차 티켓 한 장이다. 그는 이상한 끌림을 느끼고 출근도 마다한 채 리스본행 기차에 오른다. 그에게 걸려오는 학교 교장의 핸드폰 호출 따윈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우리는 살다가 이렇게 불현듯 떠나는 경우가 몇 번이나 있을까? 그런 식의 ‘떠남’은 남은 인생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아주 유명한 영화 평론가가 되었지만, A는 한때 최고의 언론사에서 영화 전문기자로 잘나갔다. 어느 날 출근을 하기 위해 회사 엘리베이터에 올랐는데 내려야 할 층에서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단다. 그길로 회사를 나와 사표를 팩스로 보내고 전업 평론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정말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했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그의 머리를 번개처럼 내리쳤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첫 장면도 주인공 조엘(짐 캐리)이 회사 출근을 위해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가 불현듯 어떤 기억이 떠올라 옛 추억을 향해 뛰어가면서 로맨스가 시작된다.
주어진 여정을 한 발 한 발 묵묵히 걸어가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이렇게 인생 행로를 과감히 벗어나 일탈을 해 보는 것도 전혀 의미가 없진 않다. 그레고리우스는 무작정 리스본에 도착하여 그녀가 놓고 간 책을 단서로 저자를 찾기 시작한다.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의 저자는 포르투갈의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프라두(잭 휴스턴)라는 의사였다. 주인공은 프라두의 삶의 여정을 뒤밟으며 그의 고결한 삶과 죽음을 통해 위안을 받고 자신을 성찰한다.
나는 첫 리스본 여행을 떠나면서 이 영화를 비행기에서 다시 보았다. 프라두의 고결한 영혼에 대한 경외심이 들었고 한 권의 책을 통해 인생의 깊이가 한층 깊어진 그레고리우스를 보며 새롭게 다시 출발하는 나 자신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이번 리스본행 여행도 불현듯 떠난 거니까.박준영 크로스컬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