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국무총리가 어제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최근 국회를 통과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재의요구권) 행사를 공개 요청했다. 주무 부처 장관들도 앞서 전날 거부권 행사를 건의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당정 협의 등 의견 수렴 절차를 거쳐 이르면 다음 달 4일 국무회의에서 거부권 행사 절차를 밟을 것으로 전망된다. 거부권이 행사되면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상임위 상시 청문회 개최를 골자로 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지 7년 만의 일이 된다.
문제의 개정안은 쌀이 정부 기준보다 3~5% 이상 초과 생산되거나 쌀값이 전년보다 5~8% 하락하면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쌀 생산과잉으로 매년 10여 만 톤이 사료용 등으로 처분되는 판국에 매년 1조 원 이상을 들여 더 사라고 강요하는 내용인 것이다. 잘라 말해 득보다 실이 크다. 오죽하면 문재인 정부도 반대했겠는가. 윤석열 정부의 거부권 행사는 단지 시간문제였다. 국회를 장악한 거대 야당은 이를 제 손의 손금처럼 훤히 들여다보면서도 자기네는 농촌과 농민을 위해 일하는데 정부가 밉상으로 군다는 식의 홍보를 하기 위해 입법권을 오남용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기가 찰 노릇이다.
한 총리는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면서 대국민담화를 통해 시장 수급조절 기능 마비, 미래 농업 투자 재원 낭비, 식량 안보 악화 등의 문제점을 들었다. 아울러 “농산물 수급에 대한 과도한 국가 개입은 이미 해외에서도 실패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1960년대엔 유럽에서, 2011년엔 태국에서 정부 가격개입 정책이 파탄을 빚은 바 있다. 전형적인 정부 실패 사례다. 민주당이 이를 알고도 포퓰리즘 차원에서 양곡관리법을 개정했다면 양심불량이고, 모르고 했다면 입법 자질이 의심스러운 집단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정부 여당을 탓하기에 앞서, 또 다른 입법폭주를 노골화하기에 앞서 원내 다수당의 책무를 돌아봐야 한다.
한 총리는 개정안을 ‘남는 쌀 강제매수법”이라고 칭하면서 “이런 법은 농민을 위해서도, 농업발전을 위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정부는 시장을 왜곡하는 정책이 아니라 농업을 살리는 다양한 지원정책을 통해 식량 생산의 수급 균형을 맞춰나가겠다”라고도 했다. 농업정책 강화와 적절한 예산 배분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식량안보를 위해서도 그렇다. 정부는 여당은 물론 야당과도 긴밀히 협의하면서 최적의 길을 찾아야 한다. 어제 대국민담화의 다짐이 허언에 그치지 않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