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산업에서는 정책의 국제경쟁력이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한다. 세계 각국은 투자뿐 아니라 유치, 세제, 표준화, 지식재산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반도체 전략들을 수립해 추진하고 있다. 여기서 한국과 일본의 반도체 전략을 비교하면 흥미있는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양국 모두 민관협력을 강조하지만 한국은 민선국후(民先國後), 반대로 일본은 국선민후(國先民後)의 모습을 취한다. 즉 한국은 기업이 앞서고 정부가 뒤에서 지원하는 데 반해 일본은 정부가 선도하고 기업이 호응하는 것이다.
한국은 경부고속도로를 축으로 서울에서 천안에 이르기까지 좌우로 SK하이닉스 이천 공장, 삼성전자 기흥 캠퍼스, 삼성전자 화성 캠퍼스, 용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등이 포진하며 이른바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를 형성하고 있다. 대단위 도시의 결합으로 이뤄진 메갈로폴리스는 행정의 벽(구획)을 넘어 민간기업에 의해 인력이동과 물류가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다. 한국의 반도체 메갈로폴리스는 민간기업이 먼저 입지하고 이를 키워나가는 데 국가가 뒷받침해주는 형식이다. 이는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K-반도체 전략의 특장(特長)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일본은 경제산업성이 ‘반도체·디지털 산업전략’으로 세계 점유율 10% 이상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잃어버린 반도체 대국의 명성을 회복하려는 국가적 총동원 체제를 목격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독일의 숄츠 총리가 일본을 연이어 방문했을 때도 빠짐없이 반도체 협력이 논의됐지만 그 직후인 3월 18일 나온 뉴스는 무척 대범하다.
일본 정부는 올해부터 반도체 분야의 젊은 연구자와 대학원생을 해외에 파견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미국 유럽의 기업과 연구기관에서 회로선폭 2나노미터(나노는 10억분의 1) 이하인 첨단제품의 노하우를 배우게 하는 것이다. 대만 TSMC 유치 등 생산기반 재구축과 아울러 국가 관여로 인재육성을 진행시켜 반도체 산업 부흥을 목표로 한다는 그랜드플랜이다.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2010년대 한국·대만업체 등과의 국제 경쟁에서 패했다. 공동화가 진행되면서 인력 부족도 심각해지고 있다. 산업을 재건하려면 질 높은 기술자가 필수다. 이 해외파견 프로그램은 도쿄대, 도쿄공업대, 도호쿠대 등 일본 톱 대학 출신의 젊은 연구자나 대학원생 등을 후보로 한다. 기술연구조합 ‘최첨단반도체기술센터(LSTC)’가 사무국이 돼 연간 수십 명을 수개월~수년 단위로 해외 유력 거점에 보낸다. 미국 IBM과 뉴욕주의 반도체 연구시설인 올바니 나노테크 콤플렉스, 벨기에의 반도체 연구기관 IMEC 같은 곳들이다.
경제산업성은 2022년도 추가경정 예산에서 국제 제휴에 의한 제조기술 개발 등 반도체 관련에 약 1조3000억 엔(약 13조 원)을 계상했다. 일부를 인재육성에 활용한다고 했다. 일본 국내에서 최첨단 제품 양산을 목표로 국내 주요 기업들이 출자한 새 반도체 회사 라피더스도 염두에 두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21년 6월 수립한 반도체·디지털산업 전략을 2023년 중반에 수정할 계획이다. 인재육성과 데이터센터 등 공공 인프라를 강화하기로 했다. 정부의 계속적인 지원을 명확히 해 반도체 산업 투자활성화로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경제산업성은 지난해 12월 차세대 반도체 양산화를 위한 연구개발 거점으로 기술연구조합인 ‘최첨단반도체기술센터(LSTC)’ 설립을 인가했다. 연구개발에는 라피더스가 참가한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디지털산업 전략에 따라 대만 TSMC 등이 구마모토현에서 건설 중인 반도체 공장에 최대 4760억 엔을 지원한다. 미국 IBM과 라피더스에도 700억 엔을 지원한다.
이제부터 세계 반도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비슷한 관료국가 한국과 일본이 취하고 있는 각기 다른 전략과 정책이 어떤 국제경쟁력의 차이를 보일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