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자 변제’란 제3자가 자기의 이름으로 타인의 채무를 갚는 행위다. 정부 보상안은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이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으로부터 확정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일본 전범 기업을 대신해서 배상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원칙적으로 제3자의 변제는 유효하므로(민법 제469조 제1항), 채권자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수령을 거절하지 못한다. 다만 제3자는 채무자와 ‘법률상 이해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게 굳어진 법 해석이고 판례다.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 채무를 지게 된 일본 전범 기업들과 지원 재단 사이에는 무슨 법률상 이해관계가 있다는 걸까?
재단 설립 근거가 되는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은 대한민국과 태평양 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와 유족 간 위로금‧미수금 지원 방법 등을 정하고 있다. 책임질 일본 전범 기업을 열거하거나 그 범위에 관한 규정이 없다.
특히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제3자는 ‘법률상 이익’을 가지는 자를 뜻하고, 단지 사실상의 이해관계를 가진 자는 제외된다. 장기간 교착 상태에 빠진 한‧일 관계를 풀고자 정치‧외교적으로 “대승적 차원”에서 내린 정무적 판단이란 설명만으로는 ‘법률상 이해관계’를 구체화할 법적 논거가 빈약하다.
강제동원 소송대리인단을 꾸려 피해자들의 전범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을 대리해 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조영선 회장은 “한국 정부는 현재 각 법원들에 계류 중인 강제동원 소송에 대해서는 피해자들이 ‘승소한다는 전제 하에’ 배상금을 지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면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들은 전체 강제동원 피해자들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재단이 판결금액을 집행할 대상은 2018년 승소한 3건의 대법원 확정판결 원고 15명으로 이들에게 지불해야 할 배상액은 지연이자를 포함해 약 40억 원으로 알려졌다.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는 2019년 10월 민변에서 “5개 도시에서 138명이 동원됐다. 숫자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외쳤다.
“영업사원이 100만 원짜리 휴대폰을 주인 몰래 아는 사람에게 미리 짜고 10만 원에 판 것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90만 원의 피해를 본 것이지, 10만 원이라도 벌어준 것 아니냐는 변명이 통할 수는 없을 겁니다.”
위례 신도시‧대장동 개발 범죄 혐의와 관련,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체포동의안을 국회에서 설명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비유다.
일본 기업으로부터 피해 배상금을 더 받아낼 수 있는데, 채권자인 피해자도 모르는 합의를 하면 이것은 ‘제값에’ 팔지 않고 고의로 ‘헐값에’ 팔아넘긴 경우와 다르다고 할 수 있겠나.
이런 일이 민간 기업에서 벌어진다면 경영진은 업무상 배임의 형사책임을 져야 한다. 강제동원 피해보상 방안은 외교부 등 우리 정부 공무원들이 벌인 일이니 ‘직무유기(職務遺棄)’죄(형법 제122조)에 해당한다.
또한 제3자가 변제를 하면 제3자는 채무자에 대해 구상권(求償權)을 취득하고, 이 구상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 대위제도(代位制度)가 인정된다. 민법상 권리다. 하지만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일본 기업의 자발적 동참을 기대한다며 구상권 행사에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공무원이 정당한 이유 없이 법률상 권리를 방기하면 이 역시 직무유기다.
김영훈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은 “향후 정부는 이번 우선 변제조치에 의해 승계한 채권에 기해 해당 일본 기업은 물론 일본 정부에게 지속적으로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해 궁극적으로는 대법원 판결의 취지를 실질적으로 실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16일 도쿄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일 정상회담을 할 윤석열 대통령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박일경 기자 ekpark@